[연재]고전이 말하는 평등 ④『옥중수고』-안토니오 그람시

▲ 김종법 교수가 『옥중수고』를 저술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불평등’은 우리 사회를 지배한 화두였다. 규제 없이 국경을 넘나들던 금융자본이 세계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최후의 이데올로기로 남은 ‘자본주의’에 대한 의혹의 눈초리 역시 커져갔다. 우리가 당연한 진리라고 믿어왔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본주의가 혹은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인위적인 체제일 뿐이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같이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는 직관을 제시한다. 그런 인식의 변화는 불평등하게 주어진 체제를 바꿀 수 있는 행동의 계기가 될 것이다. 『대학신문』은 이에, 이탈리아에서 그람시를 공부하고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외』 등 여러 번역 및 저술활동을 통해 한국에 그람시를 알려온 김종법 교수(대전대 글로벌융합창의학부)를 만나봤다.

물밑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진지전

20세기 말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해체되며 맑스주의는 그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다. 이는 단지 혁명의 실패였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혁명에 의해 무너진다는 맑스의 통찰이 부정당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왜 혁명이 실패했을까?’라는 질문과 더불어 ‘왜 자본주의 사회는 무너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후자의 질문은 러시아에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 계속 제기돼 왔다. 러시아 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발전한 서유럽에서 곧 혁명이 일어나리라 예견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그람시에게 이 질문은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에 답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점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대해 단지 물리적인 강압만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지배계급은 자신의 지배체계와 원리에 대해 피지배계급의 ‘동의’를 얻어내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전술을 택하는데, 그람시는 이런 ‘동의된 지배체계’를 ‘헤게모니 장치’라 부른다. 헤게모니 하에서 지배계급의 지배를 강화하는 요소들은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에 피지배계급은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이를 지지하게 된다. 따라서 피지배계급의 불만이 체제 자체를 향하지 못하고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김 교수는 “그람시는 당대 맑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의식이나 문화에 의해 경제적 생산관계가 결정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라며 이를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맑스주의는 ‘유물론’이기 때문에 경제적 생산관계만이 역사를 진행시키는 힘이 있으며, 모든 의식과 문화적 요소는 그 토대인 경제적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김 교수는 “그람시도 맑스주의자이기 때문에 경제적 토대에 따라 역사가 발전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관념론자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정치, 의식, 문화를 강조했다”며 “이는 당대 맑스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매우 드문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람시가 중시한 문화적 상부구조와 경제적 토대와의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엥겔스의 ‘경제는 오직 최종적인 의미에서만 역사의 원천’이라는 말을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고 서술한다. 이는 맑스주의적 유물론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을 경제적 이득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류일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또 그는 『정치경제학비판』 서문의 말을 인용해 ‘인간이 경제세계에서의 갈등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이념의 수준에서 이뤄진다’고 말한다. 경제적 이득을 고려하려면 먼저 그 상황을 인식해야 하며 이데올로기는 그런 인식의 틀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람시는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요인이 언제나 그 토대인 경제적 현상 뒤에서야 형성된다고 지적하며 기존 헤게모니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그람시의 입장은 자연스레 ‘대항 헤게모니’를 조직할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문화적 요소인 ‘헤게모니’에 의해 지배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데, 의식의 변화로 대항 헤게모니를 만든다면 지배체제가 더는 상식으로 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이런 ‘의식의 변화’를 전쟁에서의 ‘진지전’(陣地戰)에 비교한다. 이전의 혁명 개념이 전쟁에서의 갑작스런 ‘기동전’(機動戰)과 같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갈아엎는 것이었다면, 의식의 변화를 통한 혁명의 유도는 진지를 확보하듯 천천히 이뤄질 것이었다. 그람시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공간을 ‘시민사회’로 규정하는데, 이는 교회, 노조, 학교, 언론, 도서관, 클럽, 건축, 심지어 거리 이름에 달하기까지 물리적 강압 없이 작동하는 모든 문화적 요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파괴적인 기동전보다 먼저 ‘동의에 기반을 둔 의식의 변화’는 분명 민주적 요소를 지닌다. 이에 따라 그람시는 의회제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주의를 추구한 ‘유로 코뮤니즘’(Euro Communism)의 주창자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하버마스 등 ‘비판이론’이 제기하는 시민사회와도 통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했다. 그러나 ‘비판이론’의 시민사회가 공적 영역인 국가에 자유롭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그람시가 바라본 시민사회에는 이를 둘러싼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장치가 체제에 반대되는 의견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을 상정해야 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는 기존 체제에 대해 변혁적인 태도를 갖춘 맑스주의자로서의 그람시를 보여주고 있다.

그람시는 과거의 유물인가?

그렇다면 오직 ‘사회주의 혁명’을 염두에 두어야만 그람시를 읽을 수 있는 것일까? 이에 김 교수는 “그람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정답은 없다”며 심지어 “맑스주의자인 그를 자유주의자로 평가하는 해석도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의 주 저서인 『옥중수고』가 출간을 염두에 두지 않은 메모형식의 글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그의 연구가 실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진행돼, 전형적 맑스주의 이론에만 갇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시즘 정권에 의해 수감되기 전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 사이의 지역갈등을 주목한 바 있으며 이는 북부의 자본에 남부가 종속된 결과로 파악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맑스주의에서의 자본가와 노동자, 두 계급의 문제로만 파악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산업이 발달한 북부와는 달리 남부는 농업을 위주로 봉건적 체제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파악하기로는 당시 남부 이탈리아는 북부의 식민지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통일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탈리아의 상황에 힘입어 이는 단순한 지역갈등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람시는 자본가계급 혹은 봉건적 지역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이 이 점을 이용해 농민의 분노를 북부 지역의 산업노동자들에게 돌린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또 그럼에도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규율 및 조직의 경험을 바탕으로 봉건적 삶에서 벗어나본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동참할 수 있음을 파악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람시는 단순한 이론으로 다양한 사례를 설명하려 했다기보다는 ‘이탈리아 남부 문제’라는 실제 사례를 설명하고 해결하기 위해 개념을 사용하고 행동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생각한 지배계급, 헤게모니 등의 개념은 맑스주의의 틀 안에만 갇히지 않게 된다. 김 교수는 “그람시는 당대 맑스주의자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영업자나 서비스업자까지도 프롤레타리아 개념에 포함했는데, 이는 계급이 별 의미가 없는 현대에서도 그의 이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지만 이념으로 갈라진 분단국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은 아직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그람시가 분석한, 헤게모니로서의 이데올로기의 특성은 현대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 교수는 한국에 200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뉴라이트’ 등 신보수주의 운동을 그람시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해방 이후 지배계급에게 가장 중요했던 이데올로기는 ‘친미·반공 이데올로기’였다”며 “김대중, 노무현 정권 이후 친미·반공 이데올로기가 약화되며 지배계급은 체제변환의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위기감을 느낀 지배계급은 그들의 이익을 지켜줄 신보수주의 세력의 등장을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지난 몇 년간 대두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김 교수는 “오히려 (문화적 차원에서) 한국은 한 번도 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의 변화로 민주주의를 체화해온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한국은 외부의 충격으로 급격히 근대화가 진행되고, 또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지만 그 의식의 차원에서 이를 체화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또 그는 “유럽의 68혁명과 같은 ‘의식을 바꾸는 운동’이 한국에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런 주장은 우리가 그람시를 잊기엔 아직 이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맞아 더는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논쟁을 버려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버리는 것이 단지 모른 척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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