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 『야만스러운 탐정들』, 『2666』

지난 5월 로베르토 볼라뇨 컬렉션 17권이 도서출판 열린책들에 의해 완간됐다. 이전에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제외하고 볼라뇨의 모든 소설이 이 컬렉션에 포함돼 있다. 보르헤스,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필두로 하는 ‘붐 세대’ 작가들, 이들의 후광을 입은 푸익, 아옌데, 스카르메타 등의 ‘포스트 붐’ 작가들은 국내에 많이 소개되고 상당한 대중성도 확보했다. 하지만 이후 작가들은 이들의 빛에 가려 국내에서는 소개도 미진하고 별로 주목도 받지 못했기에 반가운 일이다. 특히 볼라뇨가 후배 문인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라틴아메리카문학의 현재를 가늠할 계기이기도 하다.

볼라뇨는 1953년 칠레에서 태어났고, 1968년 가족을 따라 멕시코로 이주했으며, 1977년부터 스페인에 거주했다. 시인으로 창작을 시작했으나 소설로 장르를 바꾸었고, 오랜 무명생활 끝에 1996년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과 『먼 별』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8년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떠올랐다. 이후 2000년 출간된 『칠레의 밤』에서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했고, 사망한 이듬해인 2004년에 나온 유고작 『2666』을 통해 세계문학의 신화가 됐다. 각각 2007년과 2008년에 영역된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은 모두 「뉴욕 타임스」 등에 의해 그해의 소설로 꼽혔다.

지면 관계상 『칠레의 밤』, 『야만스러운 탐정들』, 『2666』 정도만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외국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뒤의 두 대작보다 『칠레의 밤』이 오히려 많이 읽힌 것 같다. 이는 군사독재를 전면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풍경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수천명을 학살하고 집권하여 무려 18년 동안 독재를 한 피노체트의 광기, 정치범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 일상의 삶에까지 강요된 침묵, 무차별적 ‘좌파’ 척결 등등 이 짧은 소설 속 풍경들은 과거 우리나라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문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이바카체 신부라는 인물이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학살과 고문이 자행되는 동안 서재에서 고전에 심취하고, 집권한 쿠데타 주역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독재시대에 칠레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그는 죽음을 앞두고 회개는커녕 자신의 행적을 합리화시키는 추악함을 보여준다.
문학과 문인에 대한 이러한 저주는 볼라뇨의 문학세계에 일관된 것이다. 그리고 그 저주는 문학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가령,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는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무모한 삶을 살아가는 군상을 무려 1,000쪽에 걸쳐 보여주고 있다. 문학을 넘어 인간과 세계 전체가 저주의 대상인 것이다. 무려 다섯 권으로 번역, 간행된 『2666』은 한발 더 나아간다. 미스터리한 대문호 아르킴볼디의 행적과 이를 쫓는 사람들이 이 소설의 주요 이야기 축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아르킴볼디의 삶에는 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고, 그가 최종적으로 향하는 곳은 젊은 여성들에 대한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멕시코의 국경도시 산타테레사이다. ‘서기 2666년’을 뜻하는 제목 자체가 「요한계시록」의 불길한 숫자 666을 연상시키고 있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파괴가 일상이 된 2차 세계대전과 산타테레사를 오버랩시킴으로써 마치 인류문명의 파멸을 암시하는 듯하다. 볼라뇨의 문학은 이를테면 ‘저주의 문학’인 것이다.

볼라뇨의 이러한 행보는 그가 세기말 문학에서 전위주의 문학에 이르는 문학 계보의 적자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문예비평가 수전 손택이 만년에 볼라뇨에 열광한 것이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1920, 30년대 파리에서 전성기를 누린 전위주의가 1960년대 뉴욕에서 부활할 때의 지적, 예술적 토양을 대표하는 인물이 수전 손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볼라뇨가 이 문학 계보의 답습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라틴아메리카문학은 물론 세계문학에서도 회자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유목적 인간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카탈루냐에 거주하는 칠레인이 쓴 최고의 멕시코 현대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듯이 볼라뇨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고, 그 경험은 그의 문학세계에서 정주 대신 탈주를 꿈꾸고 감행하는 인물들로 승화되곤 했다. 가령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주인공들인 벨라노와 리마는 멕시코 문인 옥타비오 파스를 중심으로 한 문학 권력을 혐오하고 세사레아 티나헤로라는 1920년대의 여성 시인을 문학적 선구자로 흠모하며 그녀의 희미한 흔적을 쫓아 멕시코 북부 국경지대로 떠난다. 진짜로 문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작품조차 찾기 힘들고, 1920년대에는 드물었던 여성 문인이고, 멕시코시티를 떠나 문화적 불모지에 가까운 국경지대로 떠난 인물이라는 점에서 파스와는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 변경인이 티나헤로이다. 파스로 상징되는 정주 문학 대신 티나헤로로 상징되는 탈주의 문학을 꿈꾸는 유목적 인간으로서의 벨라뇨와 리마를 통해 볼라뇨는 중심/주변의 이분법을 넘어 호미 바바가 말하는 “사이에 낀 공간”의 창조성을 주목하는 오늘날의 구미 문학 흐름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볼라뇨의 문학세계는 구미의 문예사적 흐름과 분명히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볼라뇨에게도 이를테면 주변부 작가들의 식민적 상처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도 또한 『2666』에서도 최후의 무대가 되고 있는 멕시코-미국 국경은 역사적으로 제1세계와 제3세계가 갈라지는 경계였다.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특히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서 이 경계는 양국의 문물이 오가는 통로로서 두 세계의 차이를 좁히는 견인차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이 경계는 노동착취, 불법이주, 마약, 범죄, 환경파괴 등으로 오히려 난장판이 되었다. 『2666』의 산타테레사의 모델인 후아레스 시의 여성 연쇄살인이야말로 그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볼라뇨가 보기에 “사이에 낀 공간”은 창조적인 공간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쓰나미가 폐허로 만든 공간이고, 탈주의 가능성보다 식민적 상처가 두드러지는 공간인 것이다.

▲ 우석균 교수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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