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여주인공‘바이올라’는 부유한 상인의 딸이지만, 딸의 정략결혼을 노리는 무취미한 아버지와는 달리 연극인으로서 예술적 성취를 꿈꾼다. 바이올라는 연극배우가 되기 위해 남장(男裝)을 하고 극단의 오디션에 지원하여 셰익스피어에게 연극적 재능을 인정받는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와 바이올라의 사랑, 그리고 사랑의 힘에 영감을 얻어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바이올라는 가상의 인물이긴 하나, 영화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장치인 바이올라의 위장잠입은 여성배우가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던 당대 관행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보수적 관행 때문에 변성기가 끝나지 않은 소년 배우가 여성인물을 소화해야 했던 독특한 관습 또한 성행하였다. 당대 논객들은 연극이 허구이기 때문에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유포시켜 사회질서를 어지럽게 할 수 있다며 연극의 가치를 폄하하면서, 소년 배우의 여장 또한 비도덕적이라고 힐난했다. 이유인즉, 여장연기는 신이 정한 남성과 여성의 천성에 어긋나는 것이요, 의복을 통해 코드화된 사회적 성정체성을 일탈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보수논객의 비판에 맞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극의 허구성 혹은 연극성(Theatricality)을 옹호하고 이를 통해 계급과 성구분에 기반한 전근대적 가치관에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다. 극의 연극성이 지닌 비판능력을 실험하는 방법으로 그가 활용한 것 역시 희극 여주인공의 남장이었다. 「베니스의 상인」의 포르시아, 「당신이 좋으실대로」의 로잘라인드는 남장을 통해 정형화된 여성인물의 운신의 폭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연극성이라는 장치 하에 억압적 사회 관행을 비판할 수 있는 미학적 자유를 누린다.

 

 

 

얼마 전 야당의원으로 구성된 한 극단이 전남의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무대에 올린 「환생경제」라는 풍자극을 두고 정계가 시끄럽다. 극에서 노 대통령은 아들 ‘경제’의 죽음과 가정파탄에 책임이 있는 망나니 가장 ‘노가리’로 묘사되는 반면 야당 총재는 아들 ‘경제’를 살려 집안을 일으키려는 헌신적 어머니 ‘근애’로 등장한다. ‘노가리’에 대한 성적비하와 욕설이 문제시되자 야당은 “연극은 연극으로 봐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는데, 그야말로 극 장르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연극을 한때 웃고 넘어가기 위한 장난 정도로 보자는 말 아니면 연극의 연극성이 어떤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정치풍자극에서 연극성의 비판적 기능은 기성 정치인의 사회적 정체성을 점검해 보는 데서 발휘되어야 한다. 어쩌면 극 장르를 자기성찰이 아닌 정치선전의 도구로 오용하면서도 일부러 연극성의 독립된 미학적 가치를 운운하여 ‘난 어쩔 수 없는 정치인이요’ 커밍아웃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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