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대 미술관 '숭고의 마조히즘'전

2011년 베를린의 KW갤러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프랑스 작가 시프리앙 가이야르는 피라미드 형태로 쌓은 맥주 7천여 병을 관객들이 자유롭게 먹어치우도록 했다. 곧이어 피라미드 대신 관객들이 버린 맥주병과 상자가 너저분하게 쌓여갔다. 그런데 어느 날 관객 몇 명이 쓰레기더미를 청소하고 나섰다. 기획 의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참지 못한 전시 기획자들은 이들을 쫓아냈고 쓰레기 더미를 인공적으로 연출했다.

현대 예술계에서는 관객이 자유롭게 작품을 체험하거나 작품의 내용을 바꾸는 식의 작품이 많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면 의문이 든다. 작가가 관객의 반응을 예상하고 짜놓은 각본이 있는 것은 아닐까? 관객이 정말 주도권을 갖고 작품에 참여할 수 있을까? 서울대 미술관에서 4월 19일까지 열리는 ‘숭고의 마조히즘’전은 이러한 물음을 던지며 새로운 작가-관객의 관계를 탐구하는 전시다.

전시 기획 측은 참여형 예술을 ‘마조히즘’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마조히즘이란 물리적 혹은 정신적인 고통을 받으며 쾌감을 느끼는 정신상태다. 이때 고통을 주는 자와 고통을 받는 자 사이의 권력 관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다. 본인이 원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게 만든다면 그 상황 전체를 만든 권력은 여전히 고통을 받는 사람이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참여형 작품을 만든 작가는 관객에게 작품의 주인공이 될 권력을 주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무대를 짜는 권력자다. 손영경 학예연구사는 관객 참여 방식이 “마조히즘적인 방식을 통해 작가 자신의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작가가 마조히즘에 빠지는 한편 관객은 숭고함에 빠진다. 숭고함이란 예술품에 압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손영경 학예연구사는 “숭고는 쾌와 불쾌의 감정이 결합된 이중적인 감정이라는 점에서 마조히즘과 연관된다”고 설명했다.

 

▲ 사진② 박준범, 7개의 언어, 비디오, 5분, 2015

사진제공: 서울대 미술관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기획 의도에 설명된 작가-관객 관계를 폭로하거나 역전을 시도한다. 박준범 작가의 ‘7개의 언어’는 마조히즘적 권력 관계를 재현하는 작품이다. 이 영상 작품의 출연자들은 누구의 명령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작가가 사전에 정해준 규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작가가 작품의 주인공 자리를 출연자들에게 내줬지만 여전히 무대를 자기 방식대로 연출하는 것이다. 출연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기 때문에 소통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고창선 작가는 관객들을 참여형 예술의 덫에 빠뜨린다. 바닥에 적힌 문구에 따라 빨간색 화면에 맞춰 박수를 치자 전등이 깜박인다. 현미경으로 쌀알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관객들은 여러 지시를 수행하며 순간 작품을 능동적으로 감상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작가가 지시한 행동들은 사실 의미가 없다. 전등은 어느 소리에나 반응하며 쌀알은 평범한 쌀알이다. 섹션을 나올 때 관객들은 모니터를 통해 다른 관객들이 방금 자신이 한 것과 똑같이 무의미한 행동에 몰두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 사진① 손몽주, 확장-파장-연장, 고무밴드,2.2×4×23m, 2015

사진제공: 박재홍

 

참여를 이끄는 척 관객의 동선을 막아서는 작품도 있다. 손몽주 작가는 전시장의 벽과 벽 사이에 수많은 고무 밴드를 비스듬히 늘어뜨린 작품 ‘확장-파장-연장’을 선보인다. 관객은 이 작품의 공간 안에 들어가 작품을 마음껏 만질 수 있다. 하지만 고무 밴드를 피해 이리저리 걸어가는 것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다음 전시 공간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 길을 통과해야만 하므로 관객들은 불편함을 피할 수조차 없다.

 

관객이 예술 권력을 넘어서게 하려는 시도도 보인다. 고무 밴드를 지나 구동희 작가의 섹션에 들어선 관객은 미로처럼 놓인 차단봉을 마주친다. 차단봉은 미술관에서 관객이 작품에 가까이 가는 것을 막는 데 사용되던 기물이다. 작가는 이 기능을 역전시켜 관객의 동선을 어지럽힌다. 관객은 불편함을 느끼는 동시에 차단봉을 건드리거나 넘어뜨리면서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작품 한가운데에 버젓이 놓인 담배는 미술관의 금기를 깨뜨리려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한편 정재연 작가는 관객이 작품 제목을 직접 짓게 한다. 관객은 기이하게 구성된 철제봉과 로프, 공을 감상한 뒤 떠오른 제목을 벽에 연필로 적을 수 있다. 제목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작품 ‘라는 제목의’는 제목 짓기를 작품에 행사할 수 있는 하나의 권력으로 보고 이를 관객에게 넘겨준다.

‘전시 공간에서 작품과 관객 중 누구에게 더 큰 힘이 주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시장 바닥에 적힌 문구가 묻는다. 정답은 없지만 예술의 힘이 강한 것은 분명하다. 현대 예술계에서 ‘보러 온 손님’이었던 ‘관객’(觀客)의 개념은 깨졌지만 작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지켜내고 있다. 마조히즘을 처음 표현한 것으로 알려진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는 “내가 정말로 자신의 노예를 채찍질할 수 있는 그런 여자라면 당신은 아마 겁에 질려 떨고 있을 거예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관객들은 속지 말길. 현대 예술에서 작가들은 겁에 질려 떨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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