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진이 학예연구사
미술관

며칠 전에도 일간지에서 큐레이터라(curator)는 직업을 소개하는 특집 기사를 읽었다. 뮤지엄(museum)에서 전시 기획, 교육 프로그램 기획, 소장품에 대한 연구조사, 작품 보존 작업을 담당하는 ‘뮤지엄의 꽃’으로서의 활동, 예상 외로 낮은 임금 수준과 전문성 제고가 힘든 구조 등 여러 측면에서 큐레이터의 세계를 다룬 기사였다.

이런 기사를 접하면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직군은 아니어도 큐레이터는 꽤 세간의 관심을 받는 직업이 되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큐레이터 지망생도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하는데, 채용 조건과 응모자의 소위 ‘스펙’을 접하면 과연 내가 지금 응시하면 선발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외국어 능력도 실무 경험 이력도 뛰어나다.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실무 경험을 수년간 쌓은 후 큐레이터가 되고자 희망찬 포부를 밝히는 ‘준비된 지망생’들을 보면, 정말로 하고 싶어서 좁은문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누구라도 받을 수 있다.

이 열정 때문에 안타깝게도 큐레이터 관련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인턴직 또는 단기 계약직이 종종 열정 페이의 사례로 거론되기도 하는 것이리라. 다행히 미술문화 관련 활동에 대한 정당한 처우안을 마련하고자 몇 년 전부터 진행해오던 노력들에 가속도가 붙는 것 같다. 민간과 정부 차원에서 대책들이 속속 발표되고 공론화도 되고 있어서 불합리했던 관행들이 조만간 개선될 것 같다는 기대를 한다.

한편, 운이 좋게도(?) 정규직 큐레이터직에 입문한 나와 같은 경우는 준비생과 계약직 큐레이터의 처우라는 이슈로부터 거리 두기를 할 수 있을까, 마음 속 지지로 충분한 것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실무 경험을 쌓기 시작한 시절에도 불합리한 관행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칫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재화 된 부분은 없는지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열정 페이로 대표되는 경제적 처우 외의 다른 측면도 생각해 보게 된다.

열정 페이는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는 않을 것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경제 영역으로 완전히 치환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열정 페이가 사라진 단계에서도 분투해야 할 고비 중 하나가 ‘열정이 있어서 미안해’ 문화가 아닐까. ‘내 꿈을 전시로 펼쳐져서 행복하다. 하지만 일이 많아 고생한 사람들에게 항상 미안하다’는 어느 큐레이터의 인터뷰를 대하며 씁쓸함이 느껴졌다.

다른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전시 역시 기획부터 실행까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획자가 함께 전시를 만든 사람들에게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전시를 ‘우리’의 성취로 여기고 다 함께 자축할 여지를 사라지게하기 때문이다. 팀이 함께 하는 과제를 누군가는 무엇을 시키고 그 때문에 누군가는 고생하는 일로 여기는 인식, 이것이 혹여 이른바 ‘갑을’의 프레임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전시란 큐레이터의 개인 성과가 아닌 것 만큼이나 전시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일 역시 누가 누구를 위해 해는 괜한 고생도 아닐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열정이 있어서, 행복하게 일해서, ‘운이 좋은’ 것도 ‘미안한’ 것도 아닌 다 함께 ‘뿌듯한’ ‘전시를 만든 사람들’의 인터뷰를 꿈꿔본다.

오진이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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