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기홍 박사과정
컴퓨터공학부

과학기술을 공부하면서 느낀 묘미는 단순함이 주는 무구한 아름다움이다. 흔히 과학, 공학은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각 분야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그러하다. 허나, 한 도막이 잘 정리되고 난 이후에는 그 핵심에 단단히 꽂혀있는 지극히 단순한 손잡이만 드러난다. 후대의 연구자들과 사용자들은 그 손잡이만 잘 잡으면 쉽게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 보라.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이 머리 싸매고 만든 기술을 잘 정리했더니 요즘은 유치원생도 쉽게 스마트폰을 쓴다. 초창기 핸드폰은 별 기능도 없었는데 무어 그리 복잡했는지.

최근 학내 식당에서 실패한 과학기술의 우스꽝스러운 뒷모습을 보았다. 어느 날 식당 배식대 앞에는 제각기 다르게 생긴 카드 단말기 6대가 들풀처럼 피어나있더라. 사연인즉슨, 몇 년 전 학내 식당에 K캐시라는 대한민국 전자화폐를 도입하면서 단말기가 처음 들어왔고, 이후 SNU 캐시라는 학내 전자화폐 단말기가 추가되고, 올해부터는 일반 신용카드 단말기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도합 세 종류, 여섯 개 단말기가 오늘도 우리 밥그릇 앞을 가로막고 있다. 식당에서는 학내 구성원에게 할인된 가격으로 식권을 팔기 위해 인증이 필요한데, 학생증에 탑재되어있는 K캐시나 SNU캐시는 사용자가 별로 없다 보니 일반 신용카드를 인증 후 이용하는 시스템을 갖춘 것 같다.

이런 전자화폐 기술이 실패한 이유는 복잡하기 때문이다. 전자화폐 카드에다가 돈을 계속 충전하는 것도, 외워야 하는 비밀번호가 하나 늘어나는 것도 골치 아프다. 가게 입장에서는 단말기를 설치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이러다 보니 가맹점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그나마도 대부분 국가의 영향력이 짙은 국립대, 사관학교, 공공기관이다. 또한, 은행계좌가 필요하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이용하기도 쉽지 않다. 대비되는 것이 홍콩의 ‘옥토퍼스카드’다. 서울의 ‘티머니’같이 쉽고 간단한 지불수단인데 대중교통뿐만 아니라 편의점, 자판기 등 다양한 소액결제를 이용할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 홍콩사람들도 많이 사용하지만,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사실상 필수여서 이미 발급된 카드 수가 홍콩 인구수를 훨씬 넘어섰다. 반면 K캐시 같은 전자화폐는 복잡하다 보니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전자화폐 이용률은 지난 9년 새 90% 감소했다.

훌륭한 과학기술은 핵심만을 겉으로 드러낸다. 내부가 어떻게 생겼든지 간에 핵심만 가지고 외부와 소통한다. 이를 우리 컴퓨터 분야에서는 요약(abstraction)이라고 해서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는데, 모든 수준에서 각 요소가 핵심만 가지고 간명하게 소통하며 전체를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사용자 수준에서 보면, 그냥 사용자가 생각하는 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기술로 전 세계를 주름잡는 애플사의 슬로건이 바로 ‘그냥 돼’(It just works)였다. 인터넷에서 물건 하나 살 때마다 집 주소를 몇 번씩 입력하게 만드는 액티브X 기반 보안기술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가만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가 만난 내실 있고 자신 있는 사람들은 간명한 멋이 있지 않던가. 혹시 나는 텔레비전 리모컨에 잔뜩 달린 버튼처럼 쓸모없는 허세만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번 반성해본다. 

허기홍 박사과정
컴퓨터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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