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건축가 황두진

▲ 사진: 유승의 기자 july2297s@snu.kr

대문을 들어서자 아담한 2층 양옥 두 채가 보인다. 둘을 연결하는 구름다리 아래로 건너편 경복궁의 담장이 절묘한 평행선을 그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마당은 넓지 않지만 구석구석 한갓진 공간이 많다. 이곳은 다름 아닌 건축가 황두진 씨의 집이자 사무소다. 2층 서재로 올라가자 방을 가득 채운 햇살과 함께 그가 서 있었다.

▲ 황두진 씨의 집이자 사무소인 목련원. 이곳에서 그는 13년째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해 대화의 장 '영추 포럼'을 주최해왔다. 그는 "목적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사진제공: 박영채

그는 ‘어떤 건물을 짓는다’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건축가다. 주택이나 기업 사옥에서부터 스포츠 전문시설, 119센터, 한옥에 이르기까지 그의 다양한 작품이 곳곳에 가득하다. 기자가 그의 집을 찾아가던 길에 의도치 않게 그의 작품을 세 번이나 발견할 정도였다. 목격담을 늘어놓는 기자에게 그는 “건축가 누구나 그렇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동네 건축이라는 출발점에서=그는 한때 스스로를 ‘동네 건축가’로 소개했다. 미국 건축사 자격증도 겸비한 그가 2000년 개인 사무소를 차리고 동네에서 일하는 건축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세계적인 건축가들도 동네에서 시작했다”며 “자기 동네를 넓혀 가면 세계가 곧 내 동네가 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죠”라고 당시 자신을 돌아봤다.

그에게 서울의 오래된 동네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곳이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직원들과 함께 10시간이 넘는 서울 답사를 나서곤 했다. “예전에는 동대문에서 시작해서 동대문으로 돌아오는 식의 목표를 정했는데 지금은 목표 없이 일부러 길을 잃기도 한다”고 말하는 그는 여전히 도시를 산책하는 것을 즐기는 눈치였다.

그의 동네 건축가론은 단순히 동네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이 들어설 동네를 잘 이해한 후 건물을 짓는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2002년 그는 출판사 ‘열린책들’의 사옥을 지으며 건물이 들어설 자리가 시민이 자주 다니는 산책로임을 고려했다. 건물 2층은 1층보다 뒤에 위치하고, 튀어나온 1층 위는 발코니로 꾸몄다. 덕분에 길을 걷던 사람이 묵직한 건물에 가로막혔을 때 느껴지는 답답함이 없다. 건물 중앙에는 터널처럼 통로가 나있어 보행자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있다.

“건물은 보편적인 가치를 가져야”=지천명의 나이가 된 지금 그가 꿈꾸는 건물은 도시 안이라면 어디에서나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즉 ‘보편적' 가치를 지닌 건물이다. “지금도 건물이 들어설 장소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건물이 장소를 바꿔도 보편적인 가치, 자기 DNA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전의 생각이 분화하고 발전한 것이죠.”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건물의 보편적인 가치는 무엇일까. 먼저 그는 각 층이 다른 용도로 쓰이는 4~5층의 저층 복합건물, 이른바 ‘무지개떡 건물’을 이야기한다. “무지개떡 건물이 밀집된 도시의 사람들은 집에서 회사로 걸어 다닐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삶의 질은 굉장히 높아집니다”라고 말하는 그가 서있는 곳도 집과 사무실이 복합된 무지개떡 건물이다.

서울은 ‘복합의 기준’에서 빵점인 도시다. “한국은 20세기 서울을 계획하면서 잠은 한군데서 자고, 일은 다른 곳에서 하도록 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도로 등 사회 기반 시설을 놓고 대중 교통이나 자가용을 타게 했죠.” 무지개떡 건물은 서울의 출근 지옥을 타파할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는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이 잘 들게 하는 ‘다공성’(多孔性)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는 그가 도시의 복잡함과 과밀함을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밀도는 도시가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조건이다”라며 “도시가 이미 현대 문명의 주요 배경이 된 만큼 가까이에 레스토랑, 서점 등 모든 것이 몰려 있는 도시의 삶을 즐겨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바람과 햇볕은 현실적인 범위 안에서 도시가 주는 답답함을 덜기 위해 필요하다. 이야기하는 내내 그의 어깨 너머 창문으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어 그는 간단한 도형들을 겹쳐 놓은 투박한 스케치를 옆에 놓인 모니터로 보여줬다. “형태가 멋있고 개성 있는 건물도 좋죠. 하지만 그런 건물 안에서는 사람들이 길을 잃기 쉽습니다. 저는 단순한 기하학으로 건물을 구성해 질서를 주고자 합니다”

그는 복합, 다공성, 기하학 이 세가지 가치가 모두 담긴 작품으로 천안 ‘캐슬오브스카이워커스’ 배구 연습 경기장을 꼽았다. 선수들이 숙소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배구 코트가 내려다보인다. 발코니, 테라스, 옥상 정원이 들어선 것은 물론이고 36미터 높이의 한쪽 벽면을 열어두고 운동을 할 수도 있다. 또 단순한 정사각형, 원, 대각선만으로 건물을 구성했다. “자기가 어디에 있든 건물의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여기 식당을 보세요. 식당에서 여러 기하학이 만나면서 공간이 굉장히 풍요롭습니다.”

▲ 배구 경기 연습장 '캐슬오브스카이워커스' 내부 식당의 모습. 그는 이곳을 "여러 기하학이 만나는 풍요로운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제공: 김명식

한옥의 가치를 도시에 심다=그는 한옥에서도 현대 도시 건축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찾는다. 처마를 우산이자 양산에 빗댄 그는 처마의 덕목을 현대 도시에서 충분히 구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름 햇볕은 막으면서 겨울 햇볕은 받아들이려면 처마의 길이는 건물의 높이와 비례해야 한다. 높은 건물이 밀집한 도시에서는 이러한 처마를 그대로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처마를 잘게 쪼개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건물 외벽에 구멍이 뚫린 알루미늄 판을 덮어 처마의 기능을 재현했다. 처마가 그의 손을 거쳐 비로소 과밀한 21세기 현대 도시에 재탄생한 것이다.

2005년부터 15번이 넘는 한옥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그는 “한옥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목표는 좋은 한국의 건축을 하는 것이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한옥을 잘 다루는 것이다”며 “한옥을 가지고 다양한 시도를 했고 성공만 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꿈이 있습니다”고 말하는 그의 눈이 빛났다.

그의 한옥을 더이상 한옥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아닌지 묻자 그는 “전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요”라며 슬며시 웃었다. 통인시장 입구에는 나무 사이에 철판을 끼워 넣어 가늘고 휜 형태로 만든 그의 목조 작품이 있다.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것은 누가 봐도 한식 목재 구조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제작 방식은 오히려 한옥의 방식에 배반됩니다. 제 건물의 가치의 기원 중에 중요한 것이 한옥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옥에 사용되는 목재량을 대폭 줄이거나 복층 한옥을 쌓으려는 실험도 한옥의 가치를 도시에 심으려는 노력이다.

빽빽한 고층빌딩이 매캐한 연기에 둘러싸인 도시. 황두진 씨는 그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 “관리 잘하면 아직도 일할 날이 꽤 남았죠”라고 말하는 건축가 황두진 씨. 그의 작품이 가득한 서울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