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3·8 세계 여성의 날, 갈 길 먼 한국 여성노동의 현실

“입사 1년 차까지만 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선입견쯤이야 내가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낙관, 일을 배우는 즐거움에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미래 후배들을 위한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저만의 자부심도 있었고요. ‘남초’(男超) 근무환경에서 신선한 여사원으로 귀여움 받는 것도 좋았어요. 일 자체는 즐겁고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일 자체는 좋았는데….”

서울 소재 명문대학 전기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김영희 씨는 업계 1위 A전자에 당당히 입사했다.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결혼 이후 영희 씨의 회사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아이를 갖자 동료들의 시선도 차가워졌다. 영희 씨가 휴직계를 내면 본인들이 남은 업무를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희 씨는 버티고 버티다 출산예정일이 2주도 채 남지 않았을 때에서야 출산휴가를 겨우 신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출산 이후였다. 부모님, 시부모님 모두 멀리 떨어져 살고 계시기 때문에 출근하게 되면 당장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육아휴직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회사는 전례가 없는데다 업무 성격상 대체인력 채용이 힘들다며 말렸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해 주길 바랐지만 남편은 “남자가 육아휴직을 사용하면 회사에서 찍힌다”며 “승진에서 밀려나길 바라냐”고 오히려 영희 씨를 몰아세웠다. 결국 영희 씨는 한 달도 안 된 아이를 영아원에 맡기고 출근했다. 하지만 영아원은 6시면 문을 닫아 예전처럼 야근을 못 하게 됐고, 성과급에 반영되는 인사평가에서 동료 중 유일하게 C를 받았다. 아이를 데려가라는 영아원 선생님과 오늘도 ‘칼퇴’냐는 상사 사이에서 매번 눈치만 보던 영희 씨는 결국 입사 5년 만에 쫓기듯 회사를 그만뒀다.

일하는 여성이 살기 힘든 나라 1위. 한국 여성노동의 현주소다.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5일(현지시간) 발표한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OECD 28개 회원국 중 꼴찌였다. 유리천장지수는 나라별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방해요소를 수치화한 자료다. 작년 말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국가별 성격차지수(GGI)에서도 한국은 조사대상국 142개국 중 117위로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특히 조사항목 중 ‘경제활동 참여와 기회’ 부문은 124위에 그쳤다.

 

문제의 본질은 젠더 이데올로기

일하는 여성이 살기 힘든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젠더 이데올로기’다. 농경사회에선 경제활동과 가사노동이 마을이라는 전통적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이뤄졌다. 하지만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일터와 가정이 분리됐고 마을은 해체됐다. 그 과정에서 돌봄노동은 근대적 핵가족의 몫으로, 특히 여성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남성은 집 밖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여성은 집 안에서 가사와 육아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여성이 집 밖으로 나와 경제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게 되면서 기존의 젠더 이데올로기는 현실에서 통하지 않게 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남성 중심의 1인 생계부양자 모델에서 남녀가 맞벌이하는 2인 생계부양자 모델로 변화했다. 남성 한 명이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은 옛말이 됐고 자연스레 여성은 남성과 경제활동을 분담하게 됐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변화에도 불구하고 돌봄노동만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2014년 OECD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성이 아이와 가족을 돌보는 시간은 하루 겨우 10분으로 뒤에서 두 번째다. 남성 육아휴직 제도가 법적으로 규정된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전체 6만명의 육아 휴직자 중 남성의 비율은 2.3%에 불과하다. 한국여성민우회(민우회) 류형림 활동가는 그 배경으로 돌봄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남성 중심의 사회·조직문화를 들었다. 늦게까지 이어지는 회식과 야근, 야유회 등에 참여해야 승진에 유리한데다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 남성이 집에서 돌봄노동을 분담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남성과 여성이 각자의 노동영역을 담당하는 젠더 분업이 사실상 해체됐는데도 불구하고 과거의 낡은 인식은 남아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배은경 교수(사회학과)는 “이념이 현실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남녀의 분업을 당연시하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머물러있다”며 “이 때문에 여성은 경제활동과 돌봄노동이라는 이중 부담을 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슈퍼우먼이 되든지 일을 포기하든지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일을 계속하려면 일과 가정을 모두 책임질 수 있는 슈퍼우먼이 되거나 다른 누군가와 돌봄노동 부담을 나눠서 져야 한다. 민우회가 10년 이상 커리어를 쌓아 온 여성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여성이 일을 지속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보조양육자의 도움이 꼽혔다. 류형림 활동가는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가정 내에서 돌봄노동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스스로도 아주 운이 좋은 경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와 반대로 ‘운이 나쁜’ 대부분의 여성은 가정 내에서 돌봄노동을 해결하지 못해 가정 바깥에 이를 맡겨야 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가 짊어지고 있는 이중 부담을 시장과 정부 차원에서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다. 민간이 제공하는 돌봄노동은 비용이 가장 큰 문제다. 놀이방 운영 시간보다 퇴근 시간이 늦는 경우가 많아 가사도우미라도 고용하게 되면 월 100만~150만원의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때문에 많은 여성이 열심히 일하고도 돌봄노동 서비스에 월급의 상당 부분을 지불하고 난 뒤 막상 손에 남는 것은 별로 없는 황당한 상황을 마주한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제공하는 돌봄노동 서비스를 신뢰하기도 어렵다. 김태현 교수(성신여대 여성학과)는 “현재 우리나라에선 여성들이 정부가 제공하는 돌봄노동 서비스를 믿고 맡기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공공형 어린이집을 더 확충하겠다고 밝혔지만 관련 권한을 전부 민간에 넘겨 사실상 전혀 관리하지 않고 있다.

결국 가정, 시장, 정부 누구와도 돌봄노동을 분담하지 못한 많은 여성은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이택면 연구원은 “취업 전엔 표면상으로 비슷하던 남녀의 노동환경이 출산과 육아 이후에 완전히 달라진다”며 “25~29세 여성 취업자의 고용률은 66%지만 30~34세 여성 취업자의 고용률은 54%로 10%p 넘게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30~34세 남성들이 80% 이상의 높은 고용률을 달성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실질적인 성평등을 위한 제도 개선이 선행돼야

여성이 일하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보육교사의 자질 검증과 보육기관 관리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성 혼자 짊어지고 있는 돌봄노동의 부담을 남성과 분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김혜란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양성평등 선진국인 유럽의 경우 이미 일과 가족의 양립을 위한 정책의 대상이 여성이 아니라 남녀 모두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의식 개선을 위한 제도 확립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택면 연구원은 “이념이 먼저 바뀌고 제도가 바뀌는 경우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며 “실질적으로 돌봄노동이 남녀 모두의 의무라는 인식을 확립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남성이 자연스럽게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스웨덴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스웨덴은 70년대부터 세계최초로 휴직제도에 남성의 참여를 정부가 강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출산휴가 14주 중 2주는 남성이 의무적으로 사용해야만 하고, 육아휴직 총 480일 중 2개월도 남성이 사용해야 한다. 현재 스웨덴의 GGI는 4위이며, 스웨덴 남성이 아이와 가족을 돌보는 시간은 우리의 2배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당시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언해 많은 여성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집권 3년 차를 맞은 지금도 여성들이 일과 가정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송은정 국장은 “정부가 일하는 여성을 지원하겠다며 내세우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정책 등은 여성노동을 남성을 위한 보조 생계수단으로 보는 시각이 그대로 담겨있다”며 “이분법적인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성평등의 관점에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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