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간, 자본의 억압에서 벗어나 삶의 미학을 향해
예술인간, 자본의 억압에서 벗어나 삶의 미학을 향해
  • 이승엽 기자
  • 승인 2015.03.14 2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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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 책] 예술인간의 탄생

오늘날 예술가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주위를 돌아보면 아직도 전문 예술가들이 건재해 보인다.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유명 화가의 그림이 고가에 낙찰되고 거장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빈필하모닉의 신년연주회가 항상 매진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아트의 등장과 군중이 스스로 참여하는 플래쉬몹 등 예술가와 대중,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경계의 파괴는 예술 그 자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산업현장으로 번져나가 시장에서도 예술성은 상품화된다. 다수의 소비자는 세련된 디자인의 아이폰에 이끌려 상품을 구매하며 기업은 혁신이라는 명목 아래 직원들에게 창의성과 예술성을 요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대중으로 하여금 일상적 예술가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창의성이 요구되는 현대사회, 노동자의 예술가화 강요

책의 저자는 이러한 사회상을 바탕으로 『인지자본주의』이후 4년 만에 출간한 신작 『예술인간의 탄생』에서 현대사회의 허물어지는 예술의 경계와 그 미래에 대해 논한다. 그가 말하는 예술과 예술인간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전작에서 인지자본주의라고 평한 현대사회가설명돼야 한다. 인지자본주의는 정보와 지식이 새로운 부의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본주의 사회다. 기존의 산업자본주의가 신체 노동에 의한 물질적 생산을 중시했던 것과 달리 인지자본주의는 정신과 지식 노동, 즉 인지노동에 의한 비물질적 생산물의 가치가 더 크다고 본다.

이처럼 신체 노동이 아닌 지성과 창의가 강조되는 인지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비물질노동자에게 창의성과 자기계발이 끊임없이 요구된다. 미셸 푸코는 이런 형태의 비물질노동자에 경제인간이란 이름을 붙인다. 푸코에 따르면 경제인간은 스스로 삶을 책임지고 역량을 키워나가는 자기계발적 주체이다. 현대 자본은 ‘예술가처럼 창의적으로 되라’는 명령을 경제인간에게 내리며 그들에게 창의성과 예술성을 강요한다. 이를 통해 다중(多衆)은 자기계발을 통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저자는 경제인간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인지자본주의가 다중에게 창의성과 예술성을 요구하면서도 그들 모두가 기업가이기를 강요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윤동기에 종속된 비루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명령에 의한 자기계발은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그 창조성은 예술성의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타의적 예술성은 자기착취와 자기이용으로 귀착되며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예술성 추구를 막는다.

 

타율적 ‘경제인간’에서 자율적 ‘예술인간’으로

타의적 예술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경제인간’이 ‘예술인간’으로 이행함으로써 가능하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인간이란 단순히 외부의 예술성 발현 요구를 동기로 창의성과 예술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실재하는 예술적 욕구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발현하는 존재다. 이 내부적 원동력은 푸코가 주장한 내재적이고 표현적인 자기배려와도 연결되며 결국은 자기 인생을 설계하는 삶의 미학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한다. 저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술성의 발현이 자기해방과 자기실현, 생명의 존중과 공유의 단계로 넘어가야 하며 그것이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제시한 예술의 정치화까지 이어져 자본의 억압에 대항해 진정한 예술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어떤 예술가도 수행하지 못한, 부당한 지배기구에 대항하는 창조적 예술행위의 사례로 2008년의 촛불집회를 제시한다. 자본과 정치권력에 억압된 시민이 개방된 공간에서 어두운 밤을 밝히는 모습은 어떤 예술 행위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인간은 예술의 정치화를 통해 자신에게 억압되온 예술가의 의지를 표현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인지자본주의의 억압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전통적으로 예술가로 불려왔던 집단은 다중이 노동의 예술화를 경험하는 시기에 예술의 노동화를 경험한다.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작업은 더 이상 고귀한 행동으로 칭송되지 못하며 자본에 예속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문 예술가들의 역할은 자본에게 소유되어 있는 예술수단을 훔쳐 다중에게 돌려주는 스파이로 규정된다. 결국 예술인간이란, 전문적 예술가는 다중을 위한 공간과 수단을 마련하고, 다중은 내재된 삶의 미학적 예술 욕구를 표출하고 발현하는 인간 형상이자 집단인 것이다.

 

예술의 경계, 예술성이 발휘되는 지대

그러나 저자의 논지에서 예술의 경계와 범위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부분이 있다. 그의 기준에 따라 예술의 정치화 혹은 집단적 행동의 발현까지 예술로 판단할 경우 전통적으로 인식돼온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예술종말론의 반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술종말론은 자본이 예술을 잠식하고 이로 인해 예술 고유의 내재성이 파괴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다. 이 관점에서는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비교적 명확하며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처럼 예술의 종말을 장르의 종말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예술종말론은 저자가 주장하는 예술의 지향점이 기존 장르의 경계에서 벗어나 종말에 이르렀다고 볼 것이다.

반면에 예술진화론은 총체적 관점에서 예술을 삶 자체로 보며 예술의 본질과 경계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한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예술진화론자의 관점에서 예술종말론은 예술진화론을 예비하는 이론이라고 말하며 두 이론의 화해를 모색한다. 하지만 예술진화론을 전통적 예술의 경계를 다루는 예술종말론과 연결하기에는 예술의 정의에 대한 시각차가 여전히 존재한다.

예술진화론의 관점을 인정할 경우에도 예술인간으로의 이행이 노동의 과정 중에서 발현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의문이 남는다. 인지노동은 인간의 삶을 소진하는 행위며 이에 따라 이 과정 자체에서 인간이 창의적 예술성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또 다른 예술진화론자 프랑크 베라르디 비포는 이에 대해 ‘인간은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자동기계장치에서 벗어나 시와 느림의 원리가 되는 지대를 구축해야 하며 이 지대에서 예술이 진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2008년의 촛불집회는 노동의 현장과 단절된 느림의 지대인 광장에서 집단주체성이 발현된 예술 현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예술이 노동의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단절된 장소에서 혁명의 과정을 통해 파괴와 재탄생의 과정을 거쳐 창조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의 정치화로 달성하는 삶의 아름다움

이론적 쟁점에서 벗어나 책의 논의는 현실과 밀착해 다중의 예술가화(化)를 통한 우리 사회의 변혁 가능성을 치밀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들뢰즈, 네그리를 비롯한 여러 예술진화론자들의 이론을 확장했으며, 우리가 예술인간으로서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맞이할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과 인간 운명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예술인간을 통한 사회 변혁의 가능성은 세월호 사고 1주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세월호가족대책위원회가 가슴 아픈 비극과 사회적 억압에 대항해 실행한 행위들을 ‘예술가로 분류되지 않는 사람들이 예술가보다 더 예술가적인 사유와 미적 행동을 보여 주고 그것을 통해 전통적 예술작품보다 더 큰 예술적 감응을 불러일으킨 사례’로 제시한다. 미술관에 걸려있는 그림만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생(生)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동 또한 진정한 예술일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진실한 예술적 삶을 추구함으로써 억압에 맞서고 진정한 삶을 쟁취하라는, 현대 자본주의와는 정반대의 제안을 『예술인간의 탄생』을 통해 우리에게 건내고 있다.

 

조정환 저

|갈무리

|428쪽|2만2천원

예술인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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