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세끼>는 어떻게 로망이자 힐링이 됐을까
<삼시세끼>는 어떻게 로망이자 힐링이 됐을까
  • 대학신문
  • 승인 2015.03.1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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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한 편] tvN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 어촌편

- <삼시세끼>, 이 소꿉놀이에 왜 대중들은 빠져들었을까

예능 프로그램의 흐름에서 tvN <삼시세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다. 독보적인 팬덤을 갖고 있는 MBC <무한도전>이나 KBS <1박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려면 ‘미션’이 될 것이다. 물론 이들 프로그램들은 ‘리얼함’과 ‘자연스러움’을 통한 ‘진정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주어진 ‘미션’ 안에서의 일이다. <무한도전>은 매회 그 회의 과제를 부여하고 도전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구조이고, <1박2일>은 어느 한 장소로 특정 목적을 갖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그 구조다. <1박2일>이 <무한도전>의 여행 미션으로부터 빠져나와 하나의 분파를 형성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두 프로그램이 이렇게 미션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 미션 구조를 ‘노동’의 관점으로 읽어보면 <무한도전>이나 <1박2일>은 말 그대로 ‘노동집약적’인 프로그램들이다. 이들은 한 마디로 별 것도 아닌 일에 ‘생고생’을 자처하고 한 겨울 얼음이 둥둥 뜬 계곡물에 입수하거나 주어진 상황극 속에서 게임에 승리하기 위해 뛰고 또 뛴다. 심지어 프로레슬러들이 하는 그대로 경기를 하거나, 실제 조정경기에 투입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예능이 아니다. 다큐다. 예능인 줄 알았더니 다큐더라는 표현은 다른 말로 하면 ‘놀이’인 줄 알았는데 해보니 ‘일’이더라는 말로도 풀이된다.

나PD “이건 망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삼시세끼>는 이 흐름에 정반대로 가기로 작정한 듯, 강원도 정선으로 달려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삼시 세끼를 챙겨먹는 일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서진이 “이건 망했어”라고 첫 회에 단언한 건 예능이 다큐정도의 노동 강도를 보여줘야 그 진정성이 대중들에게 느껴진다는 걸 그가 알고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명을 켜고 새벽까지 복불복을 해도 모자랄 판에 차라리 조명을 끄고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거나, 얼마나 할 일이 없었으면 고적한 산 속 집 마당에 내리는 빗소리를 부분별로 모아 듣고 그걸 합쳐 빗소리의 성분분석(?)을 하기도 하는 이 프로그램에 대중들은 반색했다. 이서진은 망했다고 했지만 대중들은 열광한 이 하릴없는 프로그램의 정체는 뭘까. 그건 다큐가 아니라 진짜 예능이고, 일이 아니라 놀이다. <삼시세끼>는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어른들이 하는 아이들의 소꿉장난 같은 것이다. 물론 실제로 요리도 해먹고 수수밭도 거두고 텃밭도 일구지만.

이것은 나영석 PD가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나 PD는 <꽃보다> 시리즈를 하면서 너무나 힘들고 지쳐 농담 삼아 이런 얘길 했다고 한다. “어디 콕 박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삼시 세끼나 챙겨먹으면서 며칠 있었으면 좋겠어.” 이 얘기부터 시작해 차츰 발전되고 구체화된 것이 <삼시세끼>다. 결국 나 PD는 일보다는 놀고 싶어 <삼시세끼>를 구상하게 됐고, 그랬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이건 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능은 물론 놀이를 보여주지만 제작진이나 출연자들 또한 놀이가 되는 건 아니다. 그들은 놀이를 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번엔 거꾸로 생각해봤다는 게다. 일을 놀이로 해보자고.

이 강원도에서의 실험이 성공적이라는 걸 알게 된 나 PD는 <삼시세끼> 어촌편에서는 이를 극대화했다. 만재도라는 섬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만큼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지겠다는 다짐이다. 거기에 차승원과 유해진 같은 굵직한 존재감을 가진 오랜 절친이 출연한다는 건 이 소꿉놀이가 얼마나 거창한 블록버스터가 됐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세금 문제가 불거져 방송은 찍어놓고 100% 편집된 장근석을 떠올려 보라. 그가 이런 섬 마을에서 예능을 찍고 있다니. 그들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신들만의 존재감을 확실히 갖고 있는 인물들이다. 일에 있어서 프로들이라는 거다. 그런데 그들이 나영석 PD가 거대한 소꿉놀이 판으로 준비해놓은 만재도에 들어오더니 일을 떡하니 내려놓고 놀기 시작한다. 차승원은 마치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요리에 대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말도 안 되는 음식들을 만들어낸다. 홍합짬뽕에 회는 기본이고 오뎅탕에 심지어 부뚜막을 개조해 빵까지 구워낸다. 일에서도 프로급이더니 놀이에서도 프로급들이다. 중요한 건 이들이 이 삼시 세끼 챙겨먹는 걸 진짜 제대로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든든한 지원군으로 손호준이 합류하면서 남자들의 브로맨스이자, 차줌마 차승원과 참바다 유해진의 만재도 부부에 늦깎이로 들어선 늦둥이 바른 청년 손호준의 유사가족이 완성된다. 참바다는 열심히 바다로 나가 물고기든 뭐든 잡아오고(물론 낚시로 얻는 건 없고 대부분이 투망으로 잡은 것이지만) 차줌마는 그걸로 척척 요리를 해내고 청년 손호준은 그걸 맛나게 먹어준다. 그러니 이들의 삼시 세끼 소꿉놀이는 더할 나위 없어지는 것이다.

그들의 소꿉놀이에 열광하는 사람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소꿉놀이에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무려 13%가 넘는 시청률은 케이블로서는 놀라운 결과다. 이건 프로그램의 내적인 힘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수치는 아니다. 과거 Mnet <슈퍼스타K2>가 20%에 가까운 시청률을 낸 데는 허각 신드롬이라고도 불리는 사회적 정서가 반영되었던 것처럼, <삼시세끼> 신드롬은 그 안에 프로그램 외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도대체 뭘까.

다큐가 아닌 예능, 일이 아닌 놀이에 그 해답이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영석 PD가 과중한 일의 연속 속에서 떠올렸던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고 고립되어 오롯이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희구는 바쁜 현실에 치여 살아가는 대중들의 욕망과 딱 맞아떨어진 면이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열심히 어딜 뛰어다니고 도전하는 것에서 잠시 벗어나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이 <삼시세끼>라는 세계를 하나의 로망이자 힐링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도 저렇게 며칠만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이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대중들의 가슴 한 켠에서 피어났다는 점이다.

결국 대중들은 대단한 걸 이루거나 꿈꾸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삼시 세끼의 바깥에 있는 수많은 일과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탈출 혹은 도피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매일매일 전쟁처럼 살아가고,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며, 때로는 생존을 위해 한없이 비굴해져야 하는 것일까. 이럴 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결국은 더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삼시세끼>라는 이 프로그램은 제목에서부터 강렬하게 그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에 뭐 그리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놓은 셈이다.

이서진과 옥택연이 처음 해보는 시골살이에 낯설고 불편해하면서도 차츰 적응해나가고 그러한 불편함을 감수하자 비로소 삶의 본질 같은 것들을 즐기기 시작하는 건, 이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말이 그저 표현이 아니라 실로 중대한 삶의 문제라는 걸 보여준다. 그 단순함과 소박함이 삶의 실체지만 도시의 삶은 그 실체를 덮어버리고 지워버린다. 밤마저 낮처럼 밝히려는 그 강렬한 네온사인 같은 욕망은 저 하늘의 별빛을 가려버리고, 불안한 삶들이 왁자하게 모여 떠들어대는 통에 내리는 빗소리의 정취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불빛에 눈 멀고, 소음에 귀 먹은 도시인들이 잃고 있던 것들을 그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 밥 챙겨먹는 일로 되찾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심지어 만재도 같은 오지의 섬 마을조차 도시인들이 잠시 떠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네 삶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을 덕지덕지 붙인 채 살아가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삼시세끼>가 건드린 건 바로 이 간단한 삶의 본질을 보게 함으로써 피곤한 도시의 삶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일이다. 이것이 ‘힐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현실의 삼시 세끼, 소소한 로망이 되다

하지만 이 <삼시세끼>의 힐링에는 그만큼 성취가 어려워진 현실의 단면들 또한 묻어난다. 사람들은 어쩌다가 밥 세끼 챙겨먹는 일로 힐링을 삼게 되었단 말인가. 그것은 무언가를 해도 잘 되지 않는 현실을 말해준다. 언젠가부터 희망은 희망으로 남지 않고 그 뒤에 ‘고문’을 덧붙이게 되었다. 꿈꾸는 것이 좀체 이뤄지지 않는 세상. 그 세상에서 꿈은 희망고문이 된다. 그러니 거대한 꿈은 꾸어봐야 상처만 깊어질 뿐이다. 세상은 당신이 간절히 꿈꾸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걸 받아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여기서 읽혀지는 건 이미 태생에서부터 세습화되고 고착화되어버리는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노력하는 인물도 그만한 환경을 갖고 태어나지 못하면 소소해지는 삶이 우리네 현실이다. 그러니 이런 삶 속에서 서민들이 꿀 수 있는 건 큰 희망이 아니라 작은 힐링이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것. 물론 <삼시세끼>처럼 어딘가로 떠나는 일조차 지금은 대단한 결심을 해야 하는 삶일지라도, 그나마 그걸 방송으로라도 보며 위무하는 현실. <삼시세끼>가 주는 힐링 속에는 그래서 이렇게 소소해지고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에 대한 씁쓸함이 묻어난다.

세끼 챙겨먹는 일이 로망이자 힐링이 되었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세끼 챙겨먹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대충 패스트푸드로 한 끼를 때우고 사는 삶은 그 음식의 의미가 생산을 위한 에너지원 그 이상일 수 없다. 자본주의의 삶이 모든 걸 생산성으로 환원하면서 생겨난 이 소외 현상은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본질들을 지워버린다. 생산성과 무관한 일 바깥으로만 나가면 ‘잉여’로 취급받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한없이 소모되는 삶만을 강요당한다. 생산성이란 감가상각을 전제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삼시세끼>는 생산성의 관점을 뛰어넘어 우리가 잉여로 취급하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잉여가 아니라 본질이었다는 걸 바라보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그저 앞만 보고 뛰게 만드는 경주마들 같은 씁쓸한 현실 속에서 <삼시세끼>가 주는 이 깨달음과 메시지는 그래서 결코 소소하지 않다. 그러니 삶이 그대를 속일 때 가장 먼저 되돌아봐야 할 것은 자신의 몸이다. 그 몸을 채워주는 삼시 세끼라는 본질의 힘이다.

▲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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