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손길이 닿은 영화책, 차곡차곡 서고에 쌓이다
구석구석 손길이 닿은 영화책, 차곡차곡 서고에 쌓이다
  • 정서영 기자
  • 승인 2015.03.15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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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플레인 아카이브 백준오 대표

▲ "돈이 된다고 해도 플레인의 색깔에 맞지 않는 영화는 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백준오 대표에게서 플레인 아카이브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사진: 김희엽 기자 hyukim416@snu.kr

IPTV와 스트리밍으로 영화를 보는 시대, 50GB 대용량에 HD 화질을 자랑하는 디지털 매체가 있으니 바로 ‘블루레이’다. DVD보다 10배 큰 용량, 용량 대비 고품질의 데이터를 담을 수 있는 코덱 등 화려한 스펙으로 무장한 블루레이는 영상미에 민감한 영화 팬들에게 생생한 영상을 전달한다. 하지만 한 장당 3만원이라는 비싼 가격 탓에 매니아가 아니고선 존재조차 모른다. 이처럼 소수의 매니아로 이뤄진 블루레이 시장에 어느 날 제작사 ‘플레인 아카이브’가 등장했다. 블루레이 중에서도 고품격을 지향하는 플레인의 작품은 마치 책처럼 수집가들의 서고에 쌓여간다. “영화는 0과 1의 데이터가 아닌 하나의 문화”라고 믿는 플레인 아카이브 백준오 대표. 영화라는 문화를 전달하기 위한 최적의 매체인 블루레이에 자신만의 온기를 불어넣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작은 시장에서 ‘완판’ 신화를 일구기까지

백 대표는 “재미 위주의 영화만 보다가 고등학교 때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을 보고나서 영화를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영화에 애정을 갖고 있던 백 대표가 20대가 된 후 영화에 관한 글을 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너도나도 DVD의 매력에 빠져있던 2003년, 여기저기서 그를 다루는 잡지, 커뮤니티가 생겨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 그는 DVD 리뷰를 작성하는 DVD 전문가 ‘플레인’으로 통했다. 백 대표는 “DVD 리뷰란 영화 뿐 아니라 화질, 음질, 그리고 부가 영상에 대해서도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글”이라며 전문 필진으로서 느낀 보람을 털어놨다.

이어 DVD 커뮤니티 ‘DVD 프라임’, 오디오 웹진 ‘틴맨’, DVD·블루레이 제작회사 ‘라이프 랩스 미디어’에 이르는 경험을 초석으로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직장에서 블루레이 오소링*을 맡았던 그는 처음에는 남의 영화를 의뢰 받아 수동적인 작업만 했다. 그러다 영화 「무협」을 계기로 처음으로 판권을 사서 블루레이를 자체 제작하며 재미를 느꼈다. 백 대표는 “마치 영화의 제작진이 된 것처럼 다 끝난 영화를 새롭게 구성하고, 유형(有形)화된 패키지를 만드는 게 즐거웠다”고 말했다.

▲ 「레슬러」와 「멜랑콜리아」DP 컬렉션판의 케이스와 소책자. 영화의 분위기에 걸맞는 문양이 자체적으로 디자인돼 소책자에 삽입됐다.

플레인 아카이브도 자신의 손길이 담긴 블루레이를 만들고 싶다는 백 대표의 욕망에서 출발했다. 영화 「멜랑콜리아」를 보고 ‘필’이 꽂힌 그는 곧장 수입사에 연락해 판권을 샀다. 그는 “오히려 그쪽에서 이게 팔릴까 걱정을 하던데 저는 확신이 들었다”며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다른 오소링 작업을 하며 돈을 모았고 결국 플레인 아카이브의 첫 작품이 탄생했다”고 비화를 밝혔다. 때는 DVD와 블루레이 시장이 내리막을 찍던 2013년이었다. 이 와중에 관객이 적게 드는 다양성 영화로 DVD 가격의 두 배인 블루레이를 찍어내는 사업체를 차리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사양 산업에 진입한 것이 무색하게 백 대표는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첫 작품 「멜랑콜리아」의 ‘완판’을 시작으로 「돼지의 왕」,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마스터」 등이 연달아 기록적인 성과를 거뒀다. ‘1천부만 팔리면 대박’이라는 작은 시장에서 플레인 아카이브는 최소 1천2백부, 많게는 4천부까지 판매하며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제작부터 배송까지 구석구석 닿는 손길

플레인 아카이브는 독립·예술영화의 블루레이를 플레인 만의 개성으로 제작, 판매하는 소규모 회사다. ‘플레인’은 인위적인 것을 가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자는 의미에서, ‘아카이브’는 디지털 매체를 다룬다는 느낌보다 무언가를 차곡차곡 수집하는 자료원의 인상을 주기 위해 붙은 이름이다. 이름처럼 플레인 아카이브의 블루레이는 ‘영화를 제대로 소개하고 보여주겠다’는 기본에 충실하는 동시에 마치 한 권의 책 같은 느낌을 줘 수집가에게 소장하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한 권의 프리미엄 블루레이를 만들기 위해, 제작부터 배송까지 전 과정이 백 대표의 손을 거친다. 블루레이 작업의 첫 단계인 영화 선정부터 플레인은 독특하다. 백 대표는 관객이 적은 영화 중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매력이 충분한 영화를 고른다. 그리고 ‘이건 내가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만의 감으로 제작을 추진한다. 첫 작품 「멜랑콜리아」도, 개봉한 지 5년이 넘은 「더 레슬러」도 그랬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그의 직감은 매번 맞아떨어져 성공을 거뒀다. 그는 “적은 관객이 든 영화에게 제2의 기회를 주는 것이 플레인 아카이브가 하는 일”이라 밝혔다.

영화 선정이 끝나면 배급사에게 판권을 산 후, 영상, 자막, 대본, 부가영상 등 기본 재료를 받으며 부가영상이 없는 경우 직접 제작한다. 백 대표는 “보통 외화의 경우 부가영상이 따라오기 때문에 제작사가 새로 덧붙일 게 없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영화 「마스터」는 외화임에도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실시간 코멘터리가 담긴 부가영상을 통해 다른 외화 블루레이와 차별화할 수 있었다”고 답했다. 이후에 출시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는 해당 영화가 지난 10년간 영화사에 남긴 족적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플레인이 직접 제작해 삽입할 예정이다.

블루레이가 완성되면 인터넷 서점과 더불어 ‘플레인 스토어’를 거쳐 판매되며 자체 제작한 상자에 담겨 소비자에게 배달된다. 유통 과정에 많은 수수료가 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세워진 자체 스토어는 플레인다운 꼼꼼함을 보여준 계기가 됐다. 백 대표는 “많은 물량을 최대한 빠르게 포장하는 인터넷 서점과 달리 플레인 아카이브는 파손에 민감한 매니아들을 위해 뽁뽁이를 열 번씩 두른다”고 밝혔다. 또 플레인 아카이브의 택배 상자는 내구성이 뛰어난 ‘A골’이 재료가 사용됐고, 철심에 긁힐 여지를 막기 위해 접착면을 풀로 접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파손 위험을 줄인다.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소장욕구를 높이다

“내가 좋아하는 걸 손에 넣어서 언제든지 꺼내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백 대표는 ‘소장’의 참맛을 아는 사람이다. IPTV와 스트리밍은 인터넷이 끊기면 볼 수 없다. 인터넷 다운로드 파일은 손으로 만져지지 않으며 지워지면 그만이다. 그는 영화가 무형의 데이터가 되는 현실을 경계한다.

스스로가 수집가인 백 대표는 자신이 만드는 블루레이가 갖고 싶어지게끔 곳곳에 주의를 기울인다. 케이스 표지처럼 눈에 당장 보이는 부분부터 봉투의 인장 등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플레인 만의 특별한 느낌을 담는 이유다.

여기저기 손때가 묻은 듯한 수공예 디자인은 플레인 아카이브의 패키지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부여한다. 「러스트 앤 본」 디자인B 버전에 수록된 화보 카드가 담긴 하얀 봉투에는 플레인의 로고가 새겨진 도장이 찍혀있다(사진①). 숫가락을 촛불로 가열해 비즈 왁스를 녹이고, 직접 하나하나씩 도장을 찍은 공예품이다. 소책자 제본은 전문 기술자가 낡은 재봉틀로 파란색 실을 일일히 박아 묶는 실제본 방식으로 만들었다. 백 대표는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다보니 실이 박힌 모양이 조금씩 다 다르지만 그 불규칙함마저도 매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 사진① 플레인 아카이브의 로고가 담긴 도장

사진제공: 플레인 아카이브

매번 새로 제작하는 케이스 디자인은 원본 포스터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 「멋진 하루」의 케이스에는 배우 전도연과 하정우의 얼굴이 없다. 앞면엔 버스 창가의 풍경이, 뒷면에는 육교를 건너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비칠 뿐이다. 이에 백 대표는 “「멋진 하루」엔 카메라 여백이 많아 오히려 케이스에서 배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답한다. 반면 「멜랑콜리아」의 일반판 케이스에는 주인공 저스틴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황미옥 작가의 손을 거쳐 본래 푸르스름했던 배경은 영화 속 멜랑콜리아 행성이 지구에 부딪히는 찰나의 순간처럼 새하얘졌고, 음울했던 여인은 백색의 신부로 변신했다.

매니아들만 모은다는 스틸북은 금속의 질감과 한정판이라는 특별함 때문에 소장가치가 배가된다. 「더 레슬러」, 「악마를 보았다」, 「마스터」, 「제로 다크 서티」의 케이스는 스틸북으로 제작돼 매니아층의 구매욕구를 한껏 높였다(사진②). 최소 4천장을 찍어내야 하고, 단가도 높아져 모험이라고 여겨졌던 스틸북은 플레인 아카이브에게도 힘든 도전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거친 분위기가 스틸북의 디자인과 잘 맞아 떨어져 그들의 제품은 플레인의 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실제로 「악마를 보았다」는 세계 최대 규모의 블루레이 전문 포럼 HDN이 선정한 ‘올해의 스틸북’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 사진② 플레인 아카이브의 스틸북 블루레이

사진제공: 플레인 아카이브

고화질의 스틸 컷(still cut), 감독과의 인터뷰, 전문가와 영화애호가가 함께 쓴 리뷰가 담긴 소책자는 플레인만의 색깔이 담긴 구성물이다. 백 대표는 “이전의 소책자가 단순 영화 홍보 자료만을 넣은 것과 달리 우리는 책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트리 오브 라이프」의 소책자에는 사전제작 후원자로 참여한 사람들이 보내준 저마다의 소중한 생의 순간들이 담긴 사진을 담기도 했다.

플레인 아카이브의 팬들은 백 대표의 손길이 묻어난 블루레이를 ‘플레인이라서’ ‘플레인이기 때문에’ 믿고 소장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표지 디자인만 보고 구매하던 사람도,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니까 영화를 잘 모르고 구매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새 ‘플레인’ 이름이 적힌 다음 타이틀을 기다리고 있다. 백 대표는 “패키지를 예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영화에 호기심을 갖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본래 잘 모르던 사람들도 막상 영화를 보고 ‘매력이 있구나’라고 느끼게 하는게 궁극적인 목표”라고 설명했다.

블루레이 시장이 황혼기가 아니냐는 질문에 백준오 대표는 “언젠가 이 시장도 끝날거다”라고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나 백 대표는 두렵지 않다. 그에 의하면 ‘소장’은 어느 매체로든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어떤 유형(有形)의 매체로 나온다면 계속 그걸로 하면 되죠.” 벌써 그들의 로고가 박힌 8번째 작품 발매를 기다리고 있는 플레인 아카이브는 앞으로도 백 대표만의 색채가 담긴 영화책을 차곡차곡 서고에 쌓아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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