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대 창작소모임 '창문'기고-3월 23일자
인문대 창작소모임 '창문'기고-3월 23일자
  • 대학신문
  • 승인 2015.03.2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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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디올러스의 자화상

이가은(국어국문학과·13)

라모는 야콘즙 방문 판매원이다. 라모는 야콘즙을 팔러 가고 있다. 때때로 자신이 라모즙을 팔러 가는 야콘이 아닌가 헷갈려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라모는 야콘즙을 팔러 가고 있다.

프리지아 캐슬 11층. 뻣뻣하게 늘어진 복도 벽체에는 잎맥 같은 실금이 뻗어나가고 있다. 아파트는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거대 식물체처럼 겹겹이 집들을 쌓아 놓았다. 집과 집이 세포벽처럼 반복되는 곳. 라모는 한 집 한 집 꼼꼼히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을 지나 11층 복도의 끝 벽면이 눈에 닿을 때 쯤 문이 열렸다.

오랜 시간 라모는 야콘즙을 팔아왔다. 그 시간을 지나며 라모가 알게 된 것이라면, 누구도 야콘즙을 사기 위해 문을 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시할 것이 분명한 야콘즙 방문판매원의 이야기라도 듣지 않고서는 대낮 같은 무료함을 이길 수 없는 사람들만이 문을 연다. 그들은 한참을 기다려도 끝나지 않는 낮 시간을 지쳐 흘려보내고 있다. 병든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무엇하나 기대하지 않는다는 지친 얼굴로 라모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라모는 메고 온 커다란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 바닥에 앉는다. 거실은 각종 서랍장과 앉은뱅이 탁상 등으로 채워져 있음에도 널찍했다. 오른편의 유리창에서 비춰오는 건조한 햇빛이 벽면에 걸린 그림 액자에 닿아 흩어진다. 액자 속에는 비현실적이리만큼 깊고 우거진 숲이 흐릿한 형상으로 담겨 있다.

라모는 커다란 가방을 연다. 야콘즙 두 팩을 꺼내 손으로 귀퉁이를 찢는다. 투명한 비닐팩 속에서 맑은 갈색 액체가 찰랑인다. 라모는 그 중 하나에 가느다란 빨대를 꽂아 집주인에게 건네고, 나머지 하나를 자기 입 속에 부어넣는다. 비닐팩 귀퉁이를 입에 물고 완전히 진공상태가 될 때까지 빨아 마신 후 라모는 비닐팩을 커다란 가방의 앞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대여섯 개의 빈 비닐팩이 가방 주머니에 들어앉아있다. 라모는 주머니의 지퍼를 잠그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늘 제가 준비해 온 제품은 유기농 야콘즙입니다. 배즙, 사과즙, 포도즙은 아마 드셔보셨겠죠.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과일이라는 건 그 식물체의 끝을 알리는 존재란 사실. 열매가 맺히는 순간부터 나무의 생명력은 종료되고 죽음이 시작됩니다. 하루하루 시들어갈 뿐이죠. 사람들이 죽는 것도 모두 이때껏 그 죽음의 시간을 섭취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살 수 있겠습니까? 모든 생명의 근원은 뿌리에 있습니다. 모든 식물체는 뿌리에서 시작되어 자라나고 가지를 뻗어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생명에너지의 출발점은 항상 뿌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뿌리를 먹음으로써 비로소 생명에너지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제가 준비한 제품이, 생명에너지의 농축액인 야콘즙입니다. 그렇게 사기꾼 보듯이 보실 거 없습니다. 한 번 드셔보시면 아실 겁니다.

아, 흙 알갱이 같은 게 씹히더라도 걱정 마십시오. 그게 바로 자연산 유기농 야콘이라는 증거니까요. 우리는 아주 깊은 숲속에서 야콘을 재배합니다. 그곳 흙은 씹어 먹어도 좋을 만큼 고운 것들이지요. 저기 벽에 걸린 그림을 보세요. 저 그림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산 말입니다. 우거진 숲 땅속에는 생명력으로 꿈틀대는 뿌리가 가득 얽혀 있습니다. 또한 항상 안개가 자욱해 모든 풀과 나무가 촉촉이 젖어있지요. 이 습기를 머금으며 야콘은 모든 생명 에너지를 그 뿌리에 모아둡니다. 그나저나, 그림이 참 좋군요. 누구 그림이지요? 아, 모르시는군요.

그림을 보니 생각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구무입니다. 그 친구도 화가였지요. (사진작가였던가? 아무렴 어떻습니까.) 언젠가 한 번 구무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구무의 작업실은 기다랗고 비좁은 통나무 속에 들어앉은 듯 어둑하고 축축한 복도로 되어있습니다. 작업실 입구에서부터 가장 끝의 벽면까지가 일직선인, 길고 이상한 건물이지요. 사람 한 명 지나다니기에도 빠듯한 폭에 창문도 전혀 없는 건물이었기에 아주 답답했습니다. 그 복도의 벽을 가득 채운 것이 다 구무의 그림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인물화입니다. 구무의 그림 속 인물들은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쪽을 쳐다보는 얼굴 하나와 길쭉한 목 한복판에 비스듬하게 뻗어 나온 얼굴 하나. 혹은 어깨에 달라붙어 팔뚝에까지 입을 벌리고 있는 얼굴이 하나. 혹은 한 쪽 가슴에 자리 잡은 채로 자라나 다른 한 쪽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얼굴이 하나. 혹은 목덜미에 자라나서는 이쪽을 쳐다보기 위해 억지로 눈알을 굴리고 있는 얼굴이 하나.

그림들은 하나같이 나를 노려봅니다. 나이도 성별도 모두 다른 수백 수천 개의 얼굴들이 동일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더군요. 어쩐지 익숙한 얼굴들이었지만, 다시 돌아보면 전혀 알 리 없는 얼굴들이었습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거울방에 서는 기분으로 복도를 계속 걸었습니다. 가면 갈수록 복도가 좁아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숨이 막힙니다.

가느다랗고 삐죽한 나뭇가지 끝에 서듯, 나는 결국 복도 끝에까지 떠밀려 왔습니다. 마지막 벽면에 걸려있는 그림 속에는 쇄골 위로 두 개의 목이 나란히 솟은 사람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한 쪽 얼굴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얼굴 하나는 눈을 감고 있더군요.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내 친구 구무가 말했습니다. 그건 창문이야.

다시 보니 그렇더군요. 창문 속에는 얼굴이 두 개인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몸이 한 개인 두 사람일 수도 있구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눈을 뜨고 있는 쪽이 파나, 잠들어있는 쪽이 비제입니다. 파나와 비제는 대부분의 경우 둘 중 하나가 잠들어 있습니다. 둘 다 깨어있으면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데에도 설득과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파나와 비제는 한 명이 자는 동안 다른 한 명이 활동하기로 결정해두었습니다.

아침 일찍 파나는 거울을 봅니다. 잠들어있는 비제가 파나에게 머리를 기대어 옵니다. 까슬까슬한 비제의 머리칼이 파나의 귀에 닿습니다. 파나는 사랑하는 비제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부드럽게 비제의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상쾌한 아침입니다.

비제는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켭니다. 왼팔에 묵직하게 파나의 머리가 닿습니다. 평생을 함께 했어도 비제는 파나의 머리가 항상 무겁게 느껴집니다. 운동을 할 때만이라도 떼어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비제가 조금만 뛰기 시작하면 꽃가지 같은 파나의 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흔들립니다. 비제는 멈춰 서서, 너무 낯선 파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파나는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파나는 자기 몫의 음식을 그릇에 담으며 비제 생각을 합니다. 파나는 한 번도 비제와 함께 식사를 해본 적이 없어요. 파나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비제가 배가 고프지나 않을까 염려합니다. 파나는 조그만 입을 벌린 채로 잠들어있는 비제를 봅니다. 파나는 비제의 입에 수면제를 부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이미 손으로는 수면제 병의 뚜껑을 딴 상태지요. 수면제 병의 유리표면에 나무 진액 같은 갈색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파나는 손가락으로 닦습니다. 파나는 수면제 병을 들어 올렸다가, 그만둡니다. 파나는 비제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또 무엇보다, 파나와 비제의 위는 하나뿐이기 때문이지요.

비제는 이 모든 것이 아주 오래된 나무 둥치 같다고 생각합니다. 딱딱하게 굳은 둥치 위로 암녹색의 이끼가 덮이고, 그마저도 파슬파슬하게 말라버렸습니다. 비제는 그 속에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비제는 그 스스로 나무 둥치인지도 모릅니다. 비제는 누군가가 이 캄캄하고 무거운 나무를 도끼로 내리쳐 쪼개고 자신을 구해주길 기다립니다. 그러나 만약 그 나무가 비제 자신이라면, 어떡하면 좋을까요.

파나는 고민합니다. 비제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그것이 자기애인지 형제애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나는 잠들어있는 비제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가볍게 목을 졸라보기도 합니다. 파나는 다른 고민에 빠집니다. 비제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정말로 사랑하는지.

어느 날 아침 비제는 배에 이상한 통증을 느낍니다.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갈라지고 비틀리는 듯한 그런 통증이었지요. 비제는 드디어 자신이 나무가 되는 게 아닌가 기대합니다. 비제는 거울 앞에 서서 옷을 걷어봅니다. 비제의 배꼽으로부터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아래에 새순 같은 것이 움트고 있습니다. 비제는 경이로운 심정으로 셋째 동생의 발아를 지켜봅니다. 새로 돋아난 흐물흐물한 얼굴이 고개를 들고 거울을 응시합니다.

그 순간 나는 창문을 깨뜨려버렸습니다. 그 모든 광경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지요. 유리조각이 바닥에 흩어지고, 파나와 비제는 사라졌습니다. 나는 가만히 서서 텅 빈 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서글퍼집니다.

내 친구 구무에게는 미안할 따름입니다. 애써 완성해놓은 그림을 훼손시켰으니까요. 아닌가요, 사진이었나요? 아니면 창문? 아니면 거울?

그나저나, 그새 어디 가신 거죠?

 

 

라모는 거실에 홀로 앉아 있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온다. 라모는 주위를 둘러본다. 어딘가 유리창이라도 열린 듯하지만 라모는 발견하지 못 한다. 쌉쌀한 풀냄새 같은 것도 섞여 들어온다. 라모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한다.

급한 일이 있었겠지. 생각해보니 오늘 저녁에 먹을 반찬거리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집 앞 마트에 급히 다녀오려는 걸 거야. 그렇다면 금방 오겠군.

라모는 남아 있는 야콘즙을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려보기로 한다. 야콘즙 팩에 꽂힌 빨대를 뽑아 커다란 가방의 앞면 주머니에 집어넣고 지퍼를 잠근다. 라모는 야콘즙을 입 속에 부어 넣고, 진공상태가 될 때까지 완전히 빨아 먹는다. 마지막 한 모금이 목을 넘어갈 때, 라모는 목 내벽을 긁는 무언가를 느낀다. 흙 알갱이들이, 유리조각처럼 서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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