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 권고 후 3년, 여전한 인종차별

▲ 삽화: 정세원 기자 pet112@snu.kr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너~” 
최근 열명 남짓의 외국인들이 한국어로 토론하는 JTBC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이 인기를 끌고 있다. 대다수 출연진들은 단기간 한국을 방문했다가 한국의 매력에 빠져 아예 가족을 꾸려 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외국인이 이들처럼 한국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종차별의 시선 때문에 한국을 지옥으로 느끼는 외국인도 있다.

2012년 9월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위원회)는 한국이 제출한 정기보고서에 대해 총 13개의 우려 사항을 지적하고 한국정부에 이를 바로잡으라고 권고했다. 특히 위원회는 이주노동자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인종차별을 처벌하는 법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3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지적된 사항은 변하지 않았다.

 

이주노동자 처우 문제, 여전히 답보 상태

몽골에서 온 A씨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자 한국 땅을 밟았다. 돈도 벌고 기술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숙소와 식사가 너무 열악했다. 무엇보다 다른 한국 직원들이 던지는 모욕적인 발언을 견딜 수 없었다. 가뜩이나 3D업종이라 불리는 일을 하며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겪은 A씨는 직장을 옮기고 싶었지만 사업장 이동을 허가하는 사유에 해당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가 해외에서 노동력을 수입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중소기업의 인력난이 극심해지면서부터다. 정부는 인력난을 해결하고 개발도상국에 선진기술을 이전한다는 명목으로 1993년 외국인산업연수제도를 도입했다. 동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인력 송출 기관에서 국내 중소기업에 연수생을 배정해주면 정부는 이들의 입국을 허가하고 노동환경을 관리했다. 그러나 일을 배우러 온 연수생이라는 미명하에 이주노동자를 저임금 노동력으로 착취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고된 노동에 지쳐 근무지를 이탈한 연수생들이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고자 2004년 고용허가제가 도입됐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에게 국내 근로자와 동등한 자격을 보장하고 불법 체류자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에 이주노동자를 고용하고자 하는 사업자는 사전에 정부의 심사를 받게 됐다. 이로써 임금을 지급할 수 있는지, 노동환경이 열악하지는 않은지 미리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고용노동부는 고용허가제 도입 8주년을 맞은 지난 2012년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별을 두지 않고 노동관계법을 적용하여 이주노동자의 권익이 크게 신장했을 뿐만 아니라 한류를 확산하고 우리 상품의 잠재적 수요자를 확대했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정부의 평가와는 달리 이주노동자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위원회는 한국을 찾은 이주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현실을 심각한 차별적 상황이라 판단했다. 위원회는 이주노동자들이 직면한 부당한 현실을 지적하며 고용허가제의 재개정을 권고했다. 특히 위원회는 A씨처럼 이주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선택하는 데 제약을 받는 점을 문제 삼았다. 배정된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해고 △사업장의 휴업 또는 폐업 △상해 △사업장이 고용제한 조치를 받은 경우 외에는 직장을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고용허가제하에서 이주노동자가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주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최장 기간이 영주권 취득을 위한 조건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의 최장고용 기간은 4년10개월로 이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3개월간 출국해야 한다. 그러나 영주권 취득에 요구되는 조건은 5년의 지속적인 체류여서 이주노동자들이 영주권을 취득할 기회가 사실상 봉쇄된다.

또 이주노동자가 가족을 데려올 수 없어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사는 경우 그 가족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1990년 UN은 이주민권리협약에서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기본권보장을 위해 각국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아직 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위원회는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을 비준하라”며 “특히 아동에게 적절한 생계, 거주, 의료, 보건, 교육을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인종차별의 정의조차 없는 우리나라 법률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국내법엔 인종차별이 무엇인지조차 정의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원회가 권고문에서 가장 먼저 지적한 점도 인종차별의 법적 정의 부재였다. 특히 위원회는 국민의 평등을 규정한 헌법 제11조 제1항을 언급했다. 이 조항은 ‘누구든지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원회는 여기에 인종차별의 정의도 포함해 국민이 아닌 사람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현재 조항만으로도 모든 사람을 각종 차별로부터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며 따로 인종차별을 정의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도 없다. 위원회는 8년 전 논의됐던 차별금지법안이 폐기된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2007년 법무부는 성별, 장애, 나이, 출신국가, 인종, 피부색 등을 이유로 고용에서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하지만 17대 국회의 임기가 끝나면서 논의가 무산됐다. 이후 정부는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률 제정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무투마 루티에레 UN 인종차별 특별 보고관은 다시 한번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미국이나 호주 등 인종차별 범죄가 빈번한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관련 범죄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위원회는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없어 신고된 인종차별의 건수가 적은 것일 수 있다”며 “인종차별을 범죄로 규정하고 경중에 따라 처벌을 부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캐나다, 독일, 영국의 경우 인종차별금지법을 두고 차별 행위를 형사처분하고 있다. 2013년 1월 한 영국 남성이 박지성 선수를 ‘칭크’(중국인을 가리키는 모욕적인 말)라고 부른 일이 있었다. 영국 법원이 이를 동양인 비하 발언으로 보고 유죄 판결을 내려 국내에서 호응을 얻기도 했다.

지난 21일은 UN이 정한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었다. 정부는 인종차별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올해도 이주노동자와 시민단체들은 거리로 나가 이주민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위원회의 권고사항은 앞으로도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방증하듯 온라인상에는 각종 인종차별적 혐오발언이 난무하고 있다. 위원회가 우려했던 대로다. 위원회는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이 인종 우월주의적인 사상을 전파하거나 인종 혐오를 선동하는 행위까지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경한 태도를 보인 바 있다. 인종차별적 언행은 일상에서도 난무한다.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이재산 소장은 “인종차별의 범위는 상당히 넓지만 우리나라는 인종차별의 역사도 짧고 법도 없다 보니 그 개념이 불분명하다”며 “흑형이나 깜둥이처럼 본인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차별적인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