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러시아 인형」(『러시아 인형』, 문학과지성사, 2003)

오석화(전기·정보공학부·10) / 총문학연구회

 

 

1. 허구와 환상의 간극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글의 주제를 에두르는 질문 하나를 던지고자 한다. 환상이라는 것은 어떻게 눈앞의 다른 상(像)들과 구분되는가? 환상의 가장 주요한 속성을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런 경우의 거짓은 드러나기 전까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상은 환상임이 밝혀진 이후에만, 혹은 외부의 관점에서만 명명될 수 있는가. 프랑스의 학자 츠베탕 토도로프는 저서『환상문학서설』에서 ‘환상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법칙만을 알고 있는 한 존재가 겉보기에 초자연적인 사건에 직면하여 경험하는 망설임이다’라고 정의한 바 있다. 초자연이 아니라 망설임에 방점을 찍은 부분이 흥미로운데, 이를 따르자면 문학적 환상성은 판타지로 일컬어지는 소설들의 비현실적 세계관 아래서보다도 익숙하고 평범한 세계 속에서 더 많이, 강력하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에서 환상이라 불릴 것들이 발현되는 경로가 복잡하고 미묘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허구의 층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허구는 실재와 대립하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현실과 대립하는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헌데 환상이라는 것 또한 현실과 대립하는 개념이자 실재와 대립하는 개념이다. 문제는 허구와 환상이 같은 층위에 놓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단적으로, 허구는 현실과 닮을수록 그 성질이 강해지지만, 환상은 반대로 현실과 닮지 않을수록 그 성질이 강해진다. 그러니 문학이라는 허구에 환상이 개입되는 장면들은 다분히 자연스러운 것이면서도 동시에 어떤 이질성을 만들어낸다. 환상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근본적인 즐거움은 여기서부터 발하는 것일 터이다.

이때 환상문학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현실과 현대 문화의 위기에 대한 대안을 상정된 상상력에 바탕을 둔 가정의 세계를 말하’(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러시아 인형』, 안영옥 역, 문학과지성사, p.174. 옮긴이 해설에서)는 일일 수 있으며, 보르헤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가장 급진적이면서 매력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환상문학의 가능성이 결코 개인 안에서 전부 소진될 수 없을진대, 그와는 어긋나는 축에서 자신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 낸 작가들을 호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 전에 타계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이름을 들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보르헤스와 동시대에 문학 활동을 함께 했던 이유로 많은 조명을 받지 못한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없는 배추벌레와 있는 사람

 

까사레스가 1991년 발표한 단편집 『러시아 인형』에 실린 표제작「러시아 인형」은, 세속적인 일상과 풍경들 속에 단편적인 환상을 예리하게 개입시켜 낸 작품이다.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나’를 화자로, 묘한 긴장을 안고 출발하는 소설의 초중반은 그러나 환상적이라기보다 차라리 리얼리즘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그곳에서 친구 마세이라를 만나게 되고, 소설은 다시 마세이라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소설을 통틀어 비현실적이라고 부를 만한 부분은 단 한 번 등장하는데, 그것은 물론 마세이라를 비롯한 네 명의 사람들이 호수 바닥에서 ‘고양이 눈을 한, 어마어마하게 큰 푸른 배추벌레’를 만나는 장면이다. 그 배추벌레는 다른 세 명을 차례로 삼켜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마세이라는 공포에 휩싸인 채 급하게 수면으로 올라온다. 소설의 속도와 긴장감은 이를 전후로 갈리는데, 그것은 사건 이후 병원으로 찾아온 한 기자가 입원한 마세이라에게 호수 바닥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데서 시작된다.

그의 대답을 듣기에 앞서 몇 가지 흥미 있는 지점을 짚어볼 수 있다. 책을 읽는 독자로서, 아무리 호수가 오염되었던들 사람을 잡아먹는 배추벌레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초자연적인 존재를 환상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문학은 그 자체로 이미 허구의 층위에서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고양이 눈을 한 배추벌레를 적어 넣는 순간, 그것은 얼마든지 호수 밑바닥을 기어 다니고 사람들을 잡아먹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환상문학에서는 이러한 실재성으로 말미암아 환상을 조우하는 화자와 세계 간의 대립이 발생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망설임’을 화자에게 부여할 때는 대개 환상과 화자의 개인적인 충돌이 이루어지며, 그것을 독자에게 부여할 때는 작중의 누구도 환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까사레스의 소설은 이 둘 사이를 파고든다.

마세이라는 자신이 겪은 비현실성 앞에서 충분히 망설일 기회를 얻지 못한다. 다소 낭만적인 기분에 휩싸인 채 그는 기자에게 자신이 본 그대로를 이야기하고, 기자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말을 믿지 않은 채 돌아간다. 이후 그는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그는 여러 이해관계 속에 얽혀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이때 문제는 불신이 아니라, 마세이라가 무엇을 말하든 그것이 누군가의 이해에 반하는 일이 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서 발한다. 즉, 애초에 기자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배추벌레’는 필요하지도 않으며, 하여 배추벌레라는 존재는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렇듯 초현실이 무한한 대체 가능성을 지니게 됨으로써 비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은 어떤 아이러니라고까지 여겨지는데, 까사레스 문학의 환상성은 여기서 현현되며 동시에 빛을 발한다. 다시 말해, 배추벌레는 처음부터 환상으로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 내에서 환상으로 등극하는 것이다.

이때 마세이라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을 환상이 허구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환상은 오롯이 환상의 발화자, 여기서는 마세이라와 운명을 함께하게 된다. 반대로 마세이라가 작중 세계에 받아들여지고 남아 있을 수 있으려면 그의 환상이 인정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장면은 차라리 모순에 가깝다. 그것은 호수 주변에 존재하는 다른 인물들이 자신들의 세계, 즉 허구적 실재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이 갈림길에서, 작가는 배추벌레와 그의 운명을 안일하게 분리하지 않는다. 마세이라가 마침내 연인 샹딸의 전갈이랍시고 듣는 말은 이렇다.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시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 일이 사라질 때까지.”

 

3. 현실과 환상의 접점

 

환상의 종말은 부정이 아닌 망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환상이 발화되는 일을 막는 것이다. 마세이라가 배추벌레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금세 자신의 관성에 이끌려 되돌아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상이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순환계는 발화자와 청취자로 구성된다. 물론 마세이라는 자기 자신을 청자로 삼을 수도 있었다. 혹은 누구든지 붙잡고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샹딸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처음부터 발화자로서의 마세이라가 배추벌레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청취자는 단 한 명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환상과 현실이 저울 위에 동시에 올라갈 때, 그것의 경중을 재는 무게추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수식어를 뗀 이야기꾼으로서 까사레스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마세이라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러시아 인형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펠리시따스의 아버지가 “이 인형 안에는 이보다 작은 여러 개의 똑같은 인형이 들어 있단다. 하나가 부서져도 다른 것들이 있지”라고 설명하며 그녀에게 선물한 그 인형은, 결국 마세이라의 운명에 대한 비유가 되고 만다. 물질로서의 러시아 인형은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다. 거기에는 일말의 환상도 끼어 들 수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인형은 부서지더라도 여전히 인형으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실재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라지더라도 그곳에는 또 다른 실재가 있어 삶을 이어간다. 까사레스는 그것을, 그러므로 환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배추벌레에 의해 샹딸이라는 인형을 놓치고 만 마세이라가, 그를 구해준 펠리시따스와 결혼해 호텔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문학적 가능성은 결국 상상력의 가능성과 나란히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상을 그리며 살아간다. 새로운 환경은 그러한 상들이 발아하는 데에 더없이 좋은 토양이 되어준다. 그중에서 어느 것을 환상으로 치부하고 어느 것을 현재하지 않을 뿐인 현실로 생각할 것인가? 마세이라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우리는 비현실성이라는 칼로 그 둘을 단순하게 분리해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환상은 삶의 가능한 여러 층위 사이를 채워주고 이어주는 것으로서, 현실성을 머금은 채로 온전할 수 있다. 남은 문제는 그것이 접하고 있는 현실이 어떤 가치를 품고 있느냐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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