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계영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영국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풍자 SF소설이다. 이 책은 지구인 아서 덴트와 베텔게우스인 포드 프리펙트가 지구가 파괴되기 직전에 간신히 외계인 우주선에 히치하이킹을 하여 목숨을 구하고 은하계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은하계 초공간 개발위원회가 은하계 변두리 지역 개발계획에 따라 태양계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했고 지구가 그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지구는 파괴되었다. 지구가 철거되기 직전까지 도로건설계획은 지구인 누구도 알지 못하였지만 이 계획은 절차적으로 완전히 적법한 것이었다. 모든 계획도면과 철거명령은 지구로부터 ‘불과 4광년’ 거리에 있는 알파 켄타우리 행성의 지역개발과에 50년 동안이나 공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0여년 전 출간된 이 소설에서 작가는 관료주의적인 행정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적법절차의 원칙에 따르면 행정결정은 이해관계인이 알 수 있는 상태에 놓여야 효력을 발생한다. 통지를 하거나 공고를 해야 시민은 자신에게 불이익한 영향을 미치는 행정의 결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결정이 집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법리가 본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그 허울만 남아 있는 현실을 조롱한다. 지구인 누구도 현실적으로 개발계획을 알지 못했고 따라서 누구도 재판을 통해 권리를 구제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알파 켄타우리 행성의 게시판에 도면이 붙어 있었던 이상 지구의 철거를 막지 못한 것은 지구인들의 잘못이다!

재작년 대한민국 여수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선원취업 자격으로 입국한 외국인 선원이 동료 선원들의 폭행을 이유로 고용주에게 사업장 변경을 요청하였다. 고용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외국인 선원은 사업장을 이탈하였고 고용주는 출입국관리소에 무단이탈 신고를 하였다. 출입국관리소는 선원의 체류자격을 취소하고, 취소결정을 근거로 해서 적법하게 체류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강제퇴거를 명하였다. 이 선원은 공익법활동을 하는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강제퇴거명령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당사자가 한국에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이 소송의 1심과 2심에서 외국인 선원은 매우 쉽게 승소하였다. 비슷한 종류의 다른 사건에 비추어 보면 이는 의외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사건에서는 동료들의 폭행이 실제로 있었는지, 사업장을 정당하게 이탈한 것인지 무단으로 이탈한 것인지 등이 쟁점이 되고 각각의 쟁점에 대해 외국인 선원 쪽에 호의적인 판단이 내려지기가 여러 가지 여건상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심과 2심 법원은 모두 망설임 없이 외국인 선원의 손을 들어 주었다. 출입국관리소가 체류자격 취소결정을 내부의 전산에만 입력하였을 뿐 당사자에게 통지하지도 않았고 게시판에 공고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체류자격 취소결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법체류자임을 전제로 한 강제퇴거명령도 위법하다.

외국인의 출입국관리행정 분야는 국가의 외국인 정책의 필요에 따라 다른 행정 분야보다 절차적 권리가 더 많이 제한될 수 있는 분야로 알려져 있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에서도 어느 정도의 차별적인 취급은 출입국관리행정의 특성상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본다. 이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차별적 처우에도 ‘어느 정도’라는 것이 있다. 체류자격을 취소하기 전에 미리 당사자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지, 체류자격 취소결정을 할 때 결정의 근거와 이유를 자세하게 덧붙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그 결정을 통지하거나 공고해서 알려 주어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異論)이 있기 어렵다. 외계인들도 적어도 은하계 변두리의 지구인들에 대해 알파 켄타우리 행성에 공고문을 붙여 놓는 정도의 성의는 보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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