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희 사회부장

얼마 전 한 일간지가 요즘 청년들의 삶을 조명한 적이 있었다. 기사 속에 등장한 또래 청년들은 정규직에 목매지 않았다. 연봉이 낮아지고 일자리가 조금 불안정해지겠지만 정규직보다 취직 잘 되고 삶의 여유가 있는 아르바이트와 계약직을 더 선호했다. 돈 없어도 재미있게 사는, 일명 ‘가성비(價性比, 가격 대비 성능 비율) 최고인 삶’을 터득한 덕분이다. 기사는 안분지족하는 법을 깨달은 세대라며 ‘달관세대’라는 새로운 이름도 붙여줬다.

기사가 나온 후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세대’로 대표되는 세대론은 태생적으로 ‘나는 아닌데’ 식의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지만 달관세대론은 ‘우리는 아닌데’라는 반발에 부딪혔다. 기자가 밝힌 것처럼 애초에 기사의 취지는 ‘그들을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관찰을 통해 알아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특징을 가진 세대를 소개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 가치판단이 배제된,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기사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사는 모름지기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객관은 사전적으로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객관성은 불편부당이나 가치중립성과 맥이 닿는다. 물론 철저하게 중립적인 입장에서 작성되고 모든 가치로부터 동일한 거리를 유지하는 기사는 상상하기 어렵다. 애초에 중립적이라는 것 역시 다른 가치와의 비교를 전제로 한다. 게다가 보도할 사안을 선택하고, 수집한 사실을 분석·이해한 뒤 몇 줄의 글로 기사를 작성해내는 일련의 과정에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주관을 개입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달성하기 어려운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이 기사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자주 언급되는 까닭은 진실 추구라는 언론의 사명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기엔 어느 한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져 버린 기자는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진실은 이념이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자가 사명을 다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치우침 없이 보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객관성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다. 치우침 없는 보도를 한다는 명목으로 기자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방관자로 머물 때 현상의 본질이 은폐될 위험이 존재한다. ‘나만 계약직으로 사는 건 아니잖아’라는 말엔 청년 5명 중 1명은 1년 미만의 계약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현실이 숨어있었고, ‘정규직이라고 미래가 보장되는 시대는 끝난 것 아니냐’는 말의 이면엔 정규직도 안심할 수 없는 불안한 고용상황이 전제돼 있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처우는 하루가 다르게 벌어진다지만 당장 갚아야 할 학자금과 텅 빈 통장 잔고에 비정규직이라도 마다할 도리가 없었던 맥락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발버둥을 치다 결국 체념에 이른 이들을 단순히 ‘연봉 700만원 줄어도 비정규직이 낫다는 달관세대’로 명명하는 건 사안의 본질을 비껴가도 한참 비껴간 것이 아닌지.

기사가 추구해야 하는 객관성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사회 현상에 대한 관찰에서 멈추는 순간 우리는 그 이면에 숨겨진 본질에 눈을 감는 오류를 저지르는 셈이다.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눈에 보이는 청년의 모습에만 주목한 달관세대 기사는 적어도 겉으로는 불편부당하고 가치 중립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우리 사회가 당면한 구조적 문제를 새로운 세대로 착각한 것에 불과했었다.

객관성을 지향하는 것은 진실에 다가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은 사회 현상에 대한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이면에 숨겨진 본질이 무엇인지 파헤쳐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현상을 둘러싼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그 맥락을 조심스럽게 살펴 기사의 균형추를 조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기사는 특정 이념과 정파에 매몰되는 것을 피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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