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온갖 '혹세무민'하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계급투쟁의 한 형태이다. 자본가계급 측에서는 노동조합의 힘이 세어 기업을 운영할 수 없다든가, 노무현 정부가 노동자 편이라든가,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가 유순한 동남아로 공장을 옮기지 않을 수 없다든가, 앞으로 산업의 공동화로 실업률이 크게 증가하고 생활수준이 크게 저하할 것이라고 선전 선동한다. 그 반대로 노동자계급 측에서는 IMF 사태 이후 대량 해고, 비정규직 확대 등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저하했다든가,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어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이 노동자를 저버렸다든가, 대기업은 부정 부패의 온상이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기업의 경영에 참가해야 한다고 선전 선동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주장들은 각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현실화하는가는 계급들의 투쟁력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자본가ㆍ노동자 계급은 각자의 입장에서 투쟁
계급투쟁을 우려하거나 한탄하는 것은 '낭만적'
역사적인 예를 들어 보아도 그렇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들이 각자 자기의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과 '사회 전체의 이익이 증가하는 것'을 매개하는 필수불가결한 고리인데, 스미스는 이것의 존재를 '증명'한 적이 없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 애매모호한 용어로 그 당시 성장하고 있던 부르주아지를 선동해 절대주의 국가의 경제개입을 폐지시켰다. 그리고 케인즈가 주장한 '자유방임의 종언'이나 '국가 개입의 필요성'도 이론적로 '증명'된 적이 없지만, 1920년대의 영국 경제의 대불황과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 중에 실업자들의 압력에 의해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가·노동자 계급은 각자의 입장에서 투쟁 계급투쟁을 우려하거나 한탄하는 것은 '낭만적' 자본주의 사회는 대립하는 두 개의 큰 계급을 토대로 세워져 있기 때문에, 계급투쟁을 우려하거나 한탄하는 것은 '낭만적'이다. 노동자를 착취해 이윤을 증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자본가에게 이윤을 덜 보라고 요구하는 것이 먹혀 들어갈 수 있겠으며, 자본가의 큰 이윤을 갈라 먹자고 요구하는 노동자에게 잠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산업평화'나 '국가경쟁력'이나 '산업공동화'에 관해 설교하는 지식인이나 종교인은 대체로 자본가계급의 앞잡이거나 '선 무당'이기 쉬운데, 그들이 계급투쟁이 없어지기를 그렇게 원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를 타도하고 공동소유와 공동노동의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만듭시다"고 외쳐야 할 것이다.
김수행 교수
사회대·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