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의 팝아트 예술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행복한 눈물’이 뉴스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팝아트=앤디 워홀’이라는 명제가 당연시되는 한국에서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이렇게 유명해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당시 ‘행복한 눈물’이 화제가 된 것은 삼성 비자금 특검 덕분이었다. 삼성의 비자금 관리와 로비 내역이 폭로되면서 그 비자금에 100억원에 달하는 ‘행복한 눈물’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미술품이 비자금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지목되면서 당시 인터넷 검색창에는 ‘미술품 투자’ ‘미술품 재테크’ 등의 단어가 연일 오르내렸다. ‘행복한 눈물’이 화제가 되기 전에도 현대미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있었지만 구매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반대로 미술품 구매에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들은 전문가들에게 검증된 고전 작품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행복한 눈물’ 사건 이후 한국 사람들은 현대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나아가 구매 가능한 상품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미술품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수집을 하는 사람들을 ‘컬렉터’라고 칭한다. 한국에서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지만 해외 미술시장에서는 이미 크게 자리를 잡은 영역이었다. 안목이 좋은 컬렉터들의 선택에 미술관의 전문가들도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몇몇 컬렉터들은 자신만의 미술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컬렉터들의 수집품들을 일컬어 ‘프라이빗 컬렉션’이라고 한다. 컬렉션마다 차이가 있지만 결국은 개인에 의해 구성됐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모든 컬렉터들이 미술 관계자인 것은 아니다. 많은 수의 컬렉터가 미술품을 제작해본 적도 없고, 미술관에서 일해 본 적도 없다. 여기서 프라이빗 컬렉션과 미술관의 차이가 생겨난다. 우리가 미술관에 가서 보는 전시들은 큐레이터들에 의해 구성됐고,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반면 프라이빗 컬렉션은 컬렉터의 개인적 취향이나 관심에 의해 구성돼 있다. 관객에게 어떤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감상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미술관에서 제공하는 전시보다 더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최근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한 베를린에는 위와 같은 프라이빗 컬렉션들이 여러 곳 있다. 베를린이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된 데에는 독일 통일의 영향이 컸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여러 지역 출신의 예술가들이 집값이 싼 동독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미 미술업계가 거대해진 뉴욕, 런던, 파리 등의 높은 물가를 피해서 베를린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가들이 몰려들자, 미술관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예술가들과 같은 이유로, 대형 컬렉터들 또한 베를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소장품을 보관하고 전시할 곳으로 동독 지역은 최적의 선택이었다. 넓고 싼 건물들이 많았으며, 주위엔 예술가들이 넘쳐났다. 좋은 장소가 생긴 몇몇 컬렉터들은 자신의 집과 수장고에 보관해 둔 작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다음 세 곳의 프라이빗 컬렉션은 비슷한 배경을 바탕으로 시작됐지만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도 간송 미술관이나 호암 미술관, 안국동, 평창동 일대의 소규모 갤러리 등 개인 미술관이 몇 군데 있다. 개인이 소유한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 전시하고 있는 좋은 예시이다. 하지만 해외의 컬렉터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수집하거나 예술가와 협업해 전시구성을 하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재산으로 소유한 것에 더 집중한 측면이 없지 않다. 실제로 프라이빗 컬렉션이 개인, 사립 재단으로 운영되기만 할 뿐 작품의 선택이나 전시 구성은 미술관에 속한 큐레이터들이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소장품의 구성 또한 근대 이전의 작품들에 국한돼 있거나, 현대미술의 경우 그 규모에서 아쉬움이 있다. 대부분의 개인 미술관이 소장품 규모와 운영 형편 상 컬렉션 공개보다는 외부 전시를 위한 대관이나 판매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비단 미술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상업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서는 미술관 공간조차 유지시킬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은 난해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주변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미술사를 돌이켜보면 미술만이 독단적, 기형적으로 변화한 적은 없다. 결국 어떤 면에서 난해한 현대미술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닮아있을 것이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동시대의 예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님에도, 그 관심을 끌어들이는 데는 많은 계기들이 필요하다. 베를린의 프라이빗 컬렉션과 같은 선례가 한국에도 등장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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