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태구 학예연구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얼마 전 출강하는 한 대학의 수강생으로부터 A4 용지 한 장에 달하는 메일을 받았다. 개강 후 첫 강의 주제였던 ‘동아시아의 국제전쟁, 임진왜란’에 대한 질문이었다.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고 질문자에게 메일을 발송한 후, 다른 학생도 볼 수 있도록 답변 내용을 수업게시판에 올려놓았다. 한 수강생의 용기 있는 질문 8개가 나머지 49명의 수강생이 품었을 수도 있는 총 392개의 의문을 해소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질문을 처리하는 데 총 15분 남짓 소모했지만, 아마 질문한 학생은 메일을 보내는 데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학생은 이렇게 길고 상세한 질문거리를 과연 담당 강사에게 보내도 괜찮은가라는 선택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질문자가 보낸 장문의 메일 말미에는 ‘별 것 아닌 수준의 질문을 너무 많이 해서 죄송하다’라는 학생의 깍듯한 인사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왜 이 학생은 죄송하다는 표현을 썼을까? 나의 탓인가, 그의 탓인가? 아니면, 질문을 어려워하는 예의 바른 우리의 대학문화 탓인가?

나는 매 학기 초마다 수강생들에게 대학에서의 역사학은 암기 과목이 결코 아님을 강조한다. 동시에 강의 내용에 대한 질문은 수강자의 정당한 권리이니 절대 주저하지 말라고 권장한다. 그러나 나도 학창 시절에는 질문을 아끼고 또 아끼는 수강자 중 한 명이었다. 수업 진행에 방해될까봐, 잘난 척 하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수준이 너무 낮을까봐 하는 등등의 질문을 회피할 핑곗거리는 차고 넘쳤다. 게다가 최고의 학문적 권위를 갖고 계신 교수님들의 자신감 넘치는 강의 앞에서 미약한 용기마저 금방 사그라지기 일쑤였다. 결국 학부 시절 학습은 남이 던져 놓은 질문과 남이 풀어 놓은 해답만 소화하기에 급급하다 끝나버리고 말았다.

질문을 꺼렸던 습관은 막상 대학원에 진학하여 자기 논문을 쓰려고 할 때 커다란 장애물로 다가왔다. 대학원 학위 논문의 핵심 요건 중 하나는 창조성이었고, 이것은 문제 제기, 논증 과정, 해답과 결론 부분에서 끊임없이 요구되고 검증받았다. 남과 다른 질문과 사고가 학문 활동의 핵심이자 연구자로서 나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 계기였다. 그리하여 석·박사 학위 논문을 집필하는 동안 자연스레 형성된 습관 중 하나는 검토한 논문과 저서에 내 질문들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적어 놓는 것이 되었다. 물론 이 소심한 시도는 저자의 답변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나만의 말 걸기’였지만, 이러한 질문이 쌓이고 발전될수록 나의 문제의식은 깊어져갔다.

근원적 진리 탐구와 창조적 사고의 생산이라는 대학 본연의 임무를 상기한다면, 대학에서의 학습은 단순히 지식의 습득과 활용에만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 지식의 근거를 묻고 따져보는 행위까지 나아가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대학이 지향하는 역사 학습의 궁극적 목표 역시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역사학자의 서술과 해석을 달달 외우게 하는 것에 두기보다, 학습한 역사 지식을 학생 자신의 합리적 이성에 의해 비판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게 하는 사고력의 함양에 두어야 할 것이다.

대학에서 생산되고 소통되는 체계적인 지식 전반을 가리켜 흔히 학문이라고 부른다. 묘한 것은 이 학문의 한자가 ‘學文’이 아닌 ‘學問’이라는 점이다. 갈릴레이와 뉴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이디어들 중 다수가 상식적 답변에 대한 비범한 질문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을 잊지 말자! 내가 그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패기와 열정으로 뭉친 학생들의 질문이 강의실 안팎에서 쌓여갈 때, 우리 관악의 학문 공동체는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감히 전망해 본다.

허태구 학예연구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