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지영 박사수료
협동과정
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많은 사람들이 ‘정치가 싫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관심이 없음을 강조한다. 슬픈 일이다. 경제가 우리나라에서 해야 할 일이 있듯이 정치도 나름의 역할을 잘해야 한다. 경제가 우리나라가 1인당 GDP 3만달러 대열의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느냐 여부를 묻는 문제라면, 정치는 1인당 GDP 3만달러를 가지고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이냐의 문제이다. 3만달러만 넘기면 어찌 되든 족하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치 자체는 사실 중립적인 개념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 공동체를 만들어 봉건사회, 전제 왕정, 시민사회 등 여러 정치체를 거치면서, 때로는 피의 혁명을 일으키고 때로는 투사가 되어 어제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일련의 체제로 수렴시킨 것이 현재 우리를 둘러싼 정치 시스템이다. 정치는 싫든 좋든 우리의 역사를 규정지었으며,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사는 이상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협의의 정치 개념으로 보면 정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누군가가 하게끔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순간, 일상에서 정치는 작동한다.

정치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욕하기도 쉽지 않다. 내가 싫어한다는 그 ‘정치’의 대상은 국회인가, 대통령인가. 혹은 이 나라의 대통령을 뽑은 시민사회인가. 아니면 분단이라는 한반도 현실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정치 게임인가. 정치가 싫다는 사람들은 주로 우리나라 국회를 욕한다. 토론은 설득을 목표로 해야 하고 설득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평등하고 합리적이라는 믿음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나라 정치에 이러한 믿음이 없으니 상호 설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정쟁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투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 정치문화와 정치제도의 개선이 그것이다. 그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의 정치 문화의 수준에 비례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선량한 시민이라고 자부하며 사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시민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통치자가 올바른 일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할 권력에 대해 권위를 부여했다. 그런데 권위를 부여했다고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권력을 지닌 자가 일방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대상과의 도덕적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이 타락했다는 것은 권력자뿐 아니라 권력행사의 대상, 양자 모두의 타락을 의미한다. 즉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사람들은 지금의 정치 현실에 대해 절반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정치제도의 개선도 중요하다. 지금 같은 룰을 가진 경기장에서는 특출하게 다른 선수를 뽑기도 어렵고, 그런 선수를 링 위에 올려놓아도 다른 방식으로 싸우기가 어렵다. 그래서 중대형 선거구제 전환, 지역주의 타파, 기초공천폐지, 나아가 헌법 개정과 같은 근본적 제도 개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정치에 관심 없다는 말은 내 삶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더라도 무관하다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무조건 정치권을 욕할 필요도 없다. 욕할 대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타깃이 뚜렷하지 않으면 넋두리가 된다. 그러니 일단 최소한의 할 일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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