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거리에 가다 ③ 신림동 고시촌

서울대 주변엔 유별난 거리가 많다. 고시생을 비롯해 서울대생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림동 고시촌과 새로운 만남의 거리로 주목받고 있는 샤로수길은 서울대 구성원들과 삶을 함께 나누고 있는 터전이다. 낙성대 인헌시장과 행운동 벽화거리처럼 지역민의 참여로 새로운 명소로 거듭난 거리도 있다. 『대학신문』은 서울대 주변의 거리들이 과거엔 어떤 곳이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변모했는지, 현재 이 거리는 서울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본다.

① 서울대입구역 샤로수길 ② 낙성대 인헌시장 ③ 신림동 고시촌 ④ 행운동 벽화거리

 

서울대생의 유흥가 ‘녹두 거리’를 지나 신림로 11길을 걸어 올라가면 이전과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술집은 거의 없고 가파른 땅에 용케 자리 잡은 작은 신발 가게, 과일 가게, 세탁소가 보인다. 붉은 벽돌 건물부터 하얀 대리석 건물까지 다양한 모습의 원룸과 고시원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멀리서 새소리만이 들려오는 고즈넉한 이곳은 신림동 고시촌이다.

▲ 훤히 내려다보이는 신림로 11길의 모습.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주민들은 오토바이를 교통수단으로 자주 이용한다.

사진: 장은비 기자 jeb1111@snu.kr

신림동에 뿌리내린 고시 문화

신림동 고시촌은 관악산 꼭대기 절에서부터 시작됐다. 오래전 고시생들은 한적한 관악산으로 보따리를 싸고 들어가 속세와 연을 끊은 채 사법시험(현 사법고시) 공부에 매진했다. 녹두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빈대떡집 주인 전정숙 씨는 “이 일대가 다 허허벌판에 판잣집일 때 저 위 산꼭대기 절에서 먹고 자면서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1970~80년대 이르러 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고시생들은 시험 정보를 얻기 위해 ‘고시사찰’에서 나와 평지로 내려왔다. 많은 주민들이 쪽방에 하숙을 놓아 고시생을 받았고 값싼 한 평짜리 방에서 식사가 제공되는 ‘고시원’도 등장했다. 신림 9동(현 대학동) 일대가 ‘고시촌’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특히 1975년 서울대가 동숭동에서 관악구로 옮겨오면서 이곳은 서울대 학생들로 북적였다. 고시를 준비하는 서울대생 다수가 하숙이나 자취를 하자 마을은 곧 고시로 유명세를 탔다. 40년 넘게 신림에서 지낸 상인 이동춘 씨는 “신림에 사는 서울대 학생들 중에 합격자가 많이 나오면서 입소문이 났다”고 말했다.

이후 1990년대 경제위기로 취업이 어려워지자 고시 공부를 대안으로 선택하는 도피형 응시생이 늘었고 신림동 고시촌은 절정기를 맞았다. 계속 몰려드는 고시생들로 인해 2000년대 초 고시촌 상주인구는 3만여명에 달했다. 주민들은 당시 “시골 사람들도 고시촌하면 신림동인줄 알았다”고 입을 모았다. 늘어난 고시생이 즐길 수 있는 만화방, PC방, 헬스장, 커피숍 등 유흥시설도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이처럼 고시와 함께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신림동 곳곳에는 ‘고시 문화’가 배어 있다. 먼저 가난한 고시생을 배려한 고시촌 식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고시생들은 매일 식사 시간이 되면 고시식당과 고시뷔페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식당 주변 서점에서 책을 사면서 식권을 싸게 구입한다거나, 한 달치 식권을 할인된 가격으로 미리 산 뒤 양껏 먹을 수 있는 ‘월식’은 이 곳만의 독특한 문화다. 3,800원짜리 한 끼에 9가지 반찬과 후식까지 제공하는 애플 고시뷔페 이계숙 사장은 “박리다매로 많이 팔면 어느 정도 남는다”고 말했다.

▲ '맛있는 세상'의 상인 이수자 씨. "요 동네 인심은 참 좋아. 다들 열심히 노력해서 사는 사람이라 시골하고 똑같애. 번쩍번쩍 불도 없고 공부하기도 와따라."

사진: 장은비 기자 jeb1111@snu.kr

고시생들은 반경 500m 안에 있는 고시원-독서실-식당을 오가며 수험 생활의 모든 것을 해결한다. 고시서점은 인터넷이 없던 시절 기출 문제 등 각종 고시 정보의 원천이었으며 지금도 노장 주인들은 출제 흐름을 꿰고 있다. ‘법문서적’ 사장은 “학생들이 오래 자주 쓰니까 닳는다”며 수험서 겉표지를 비닐로 포장하면서 “요즘은 교수책보다 강사책이 더 잘나간다”고 슬쩍 귀띔했다. 비싼 법문이나 교재를 복사집에서 제본으로 만들 수도 있다. 도림천 쪽 대로변에 위치한 대형 학원에서 고시생들은 실시간 강의를 듣기도 한다. 고시생 패션의 필수품인 삼선 슬리퍼와 원목으로 된 독서대가 문구점마다 진열된 풍경도 쉽게 볼 수 있다.

독서실에는 고시생들이 공부와 일을 함께 하는 아르바이트 문화가 자리 잡았다. 독서실 입구에서 창구를 지키는 총무는 고시생들의 흔한 아르바이트 종목이다. 10년째 사법 고시를 준비하며 총무 일을 하고 있는 김 모 씨(33)는 “아르바이트는 에너지 뺏길까봐 고시촌 밖으로 나가서 하는 일은 절대 안 한다”며 “일하는 시간이 끝나면 심호흡을 한 뒤 독서실에 들어가 공부한다”고 말했다. 한 공간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는 아르바이트 문화는 소득이 없는 고시생들이 고시촌 안에서 살아갈 나름의 방편으로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처럼 신림동 고시촌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오로지 고시 공부에 최적화된 문화가 형성됐다. 1년간 신림동 고시촌을 연구한 서울역사박물관 윤남륜 학예연구사는 “한 지역이 교육 특화지역이면서 일일생활권으로서 고시촌으로 형성된 경우는 전국적으로 신림동이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뿌리부터 흔들리는 고시촌

▲ 신림동 고시촌에는 전봇대마다 빈방을 알리는 광고가 붙어있다.

사진: 장은비 기자 jeb1111@snu.kr

2007년 발표된 ‘2017년 사법고시 폐지’는 고시가 곧 정체성으로 굳어진 신림동 고시촌에 대한 사형 선고였다. 고시촌이 슬럼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여기는관리형독서실’ 송영욱 사장은 “독서실 사업을 시작하던 10년 전만 하더라도 전체 신림 고시생의 70% 정도가 사법고시 준비생이었다”며 “지금은 대부분 고시를 포기하거나 변호사 시험 등으로 전환했다”고 설명했다.

국가고시가 축소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고시생이 손님의 전부였던 고시촌 원룸 주인들은 시름을 앓고 있다. 전국고시원협회의 추산에 따르면 동네 700여 곳의 고시원과 원룸의 공실률은 40~50%다. 이는 전봇대와 벽 곳곳에 ‘빈방 있습니다’ 하는 광고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로변에 위치한 ‘한림고시원’ 사장은 “방 43개 중에 10개 가까이 비었다”며 “특히 올해 들어 여학생이 작년의 3분의 1정도로 줄었다”고 말했다. 위쪽 고시원은 가파른 경사 탓에 입지가 불리하고 지어진 지 오래돼 상황이 더 심각하다. 산중턱에 위치한 한 고시텔 사장은 “15~20만원으로 내놨는데도 20개 중에 반이 비었다”고 말했다.

이른바 ‘고시 브랜드’로 유지되던 마을 전체가 휘청거리는 모습은 식당, 독서실, 서점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상가 건물이 빈 채로 몇 달째 남아 있고, 상인들은 매출이 반토막 났다고 하소연한다. 고시원 1층 식당 ‘맛있는 세상’에서 가정식 백반을 파는 이수자 씨(62)는 “여태 그냥그냥 했는데 올해 3월에는 장사가 영 안됐다”며 “작년만 해도 시험 보는 학생들에게 내가 참 열심히 기도해줬는데 요새는 기도해줄 학생이 없다”고 슬픈 눈으로 말했다.

한편 고시촌이 쇠락하는 분위기를 비집고 들어온 외국인, 직장인 등 유입 인구가 비어 있는 거주 공간을 채우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불편한 교통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점점 더 저렴해지는 물가에 이끌려 이곳을 택했다. 고시촌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기초생활수급자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대학동주민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기초생활수급자는 2013년 175가구 241명에서 2015년 253가구 323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시촌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림고시원 사장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중국 교환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고 많이 온다”며 “정을 줬다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너무 서운하고 계속 생각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고시촌의 값싼 방을 찾는 직장인 중 다수는 소득이 여유롭지 않은 사회 초년생으로 드러났다. 서울연구원의 2012년 연구에 따르면 대학동(신림 9동)은 서울시에서 청년층 1인 가구가 두 번째로 많이 거주할 정도로 사회 초년생 인구가 많다. 주머니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시촌을 택한 이들이 여유가 생기면 곧바로 신림을 떠난다는 지적이 있다.

▲ 1인 가구가 많은 고시촌에서 한 집에 계량기가 여럿 달려있는 풍경은 흔하다.

사진: 장은비 기자 jeb1111@snu.kr

더불어 직장인들은 고시촌에 살면서도 이곳에 자리 잡아온 상품과 서비스를 즐기지 않는다. 군자에 직장을 두고 반년 동안 고시촌 원룸에 거주하는 최빛나 씨(27)는 “급하게 방을 구하느라 이쪽에 살게 됐다”며 “주말에는 여기서 안 놀고 강남과 같은 번화가에서 논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태연 씨(25)도 “녹두 거리라는 말을 들어는 봤지만 가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시 샛길은 고시생들에게 수험 생활을 보내는 삶의 공간이지만 직장인에게는 그저 출퇴근 시간 급히 지나치는 곳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식사를 직장 근처에서 해결한다고 했다. 고시생이 하루 일과를 모두 일궜던 고시촌이 점차 직장인들의 베드타운이 되는 것이다.

 

잿빛 마을이 되지 않기 위해

이처럼 신림의 정체성이었던 고시촌 문화가 쇠락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고시촌을 정체성이 사라진 ‘잿빛 마을’로 만들지 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먼저 한 토박이 사업가는 기존의 교육 특화 지역으로서 정체성을 이어가기 위해 승부수를 띄웠다. 송영욱 사장은 다수의 독서실이 문을 닫는 상황에 대응해 고시생과 재수생이 멘토-멘티로 만나 독서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대학입시를 고시촌에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다. 신림동 독서실 사업에 청춘을 바친 그는 “이 고시촌이 하나의 특색 있는 마을로서 유지되고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말했다.

다양한 시험이 생겨난 흐름에 발맞춰 고등고시 외에 다양한 수험생을 끌어들이려는 노력도 많다. 고시 서점은 9급공무원 시험, 경찰공무원시험, 변호사시험 등을 위한 서적의 물량을 늘렸고 고시 학원은 사법 고시 강좌를 대폭 줄이는 대신 다른 시험에서 경쟁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다. 노량진에서 경찰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가 신림으로 옮겨 온 백승민 씨(25)는 “노량진은 자리도 좁고 불편했는데 이곳은 지정석이라서 편하다”며 만족해했다.

새로 유입된 인구에 맞춰 업종을 전향하는 사업가도 있다. ‘VINO&BEAN’ 장지용 사장은 부모님이 20년간 독서실로 운영해온 자가 건물을 올해 3층짜리 젊은 감각의 카페로 개장했다. 고시촌답게 커피 값도 3,000원대로 저렴하다. 이와 같이 녹두거리 부근을 중심으로 작지만 비슷한 카페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서울에서 가장 저렴한 카페거리로 소문나기도 했다.

한편 신림동에서 자생한 문화 단체들은 고시촌에 문화 공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자 힘을 쏟고 있다. 신림동 청년 단체 ‘다리 밑 프로젝트’는 도림천 다리 아래서 버스킹을 하는 여러 청년 뮤지션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이들은 작년 10월 도림천 다리 두 곳에서 축제를 열어 주민 1,000여명과 음악을 함께했다. 동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동네를 활성화시킬 방법을 고민한다는 그들은 청계천보다 폭이 넓은 도림천은 문화 활동 공간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말한다. 신림동에서 나고 자란 홍민선 대표(29)는 “작년부터 우리와 비슷한 청년 단체들도 서로 모르는 채로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고 말했다.

반백 년 가까이 ‘국가고시를 위한 거리’라는 정체성을 굳게 지녀온 신림동 고시촌 거리는 지금 혼란스럽다. 거리를 가득 채웠던 고시생은 빠져나가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각자 삶에 바빠 고시촌 골목을 거닐 여유가 없다. 최근 고시촌은 ‘고시식당이 식권을 대량 판매한 뒤 야반도주하고 청년 실업자가 원룸에서 연탄 자살을 하는 곳’으로 언론에 그려졌다. 그러나 함부로 거리의 몰락을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으며 여전히 동네의 가치를 믿는 많은 사람이 땀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노력을 거쳐 고시촌은 어떤 빛깔을 띠게 될까.

자료 협조: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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