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역사용어사전』 출간

지난달 30일 호암교수회관 목련홀에서 『역사용어사전』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성낙인 총장을 비롯한 학내외 인사들과 『역사용어사전』 편찬에 참여한 학자들이 모여 국내 최초의 역사용어사전 출간을 축하했다. 사전의 편찬책임자였던 최갑수 교수(서양사학과)는 “9년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글을 써주고 기다려준 300명이 넘는 학자들과 실무적으로 애를 많이 쓴 편찬팀, 한국연구재단과 출판문화원에 깊이 감사한다”며 소회를 밝혔다.

▲ 사진: 김명주 기자 diane1114@snu.kr

9년간의 고생 끝에 탄생한 
해방 후 한국 역사연구의 총체

서울대 역사연구소에서 편찬한 『역사용어사전』은 2006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편찬 작업이 시작된 이후 9년에 걸친 노력 끝에 출간된 역작이다. 이 책은 국내 역사학 분야 최초의 용어사전으로, 역사학자 300명이 참여해 2,136쪽에 걸쳐 1,500여개 표제어를 설명하고 있다.

『역사용어사전』에서 표제어를 다루는 방식은 국어사전처럼 모든 용어와 그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전반의 이해와 인식에 필요한 표제어를 한국 사학계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곳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부터 한국의 80년대 민주화 운동, 그리고 현재의 학생, 노동, 여성, 환경 운동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200자 원고지 1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모든 표제어의 설명 뒤에 참고 문헌을 실어 서술의 기반이 된 실제 연구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기존에 한국에서 통용되는 역사사전은 유럽이나 중국, 일본의 사전들을 그대로 번역해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한국에서 바라본 역사가 아닌,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이기에 우리 자신의 역사 연구 정체성을 담을 수 없었다. 이에 최갑수 교수는 ‘우리가 만든 최초의 역사용어사전’이라는 목표 아래 편찬팀을 꾸려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구와 논문 작성에만 익숙한 학자들에게 처음 시도하는 사전 편찬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 우리가 사전 편찬 경험이 없어 9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많은 학자의 글을 모아서 편집 및 수정을 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고 아쉬워했다.

사전에 실을 표제어 선정과 서술 원칙을 두고 편찬팀 내에서 끝없는 논의가 계속됐고 1,500여개의 방대한 표제어를 다루다 보니 집필과 수정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또 교수 간의 연구 성과나 학문의 깊이 차이에 따라 각 표제어들의 설명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표제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문제점이 발생했다. 사전 속 ‘쿠데타’ ‘유신’ 등 한국 현대사 속 역사용어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서술하는 데 더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사진: 김명주 기자 diane1114@snu.kr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의
연구를 한 데 모아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서울대 역사연구소가 『역사용어사전』을 편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엄격히 분리된 사학체계를 극복해 하나의 역사학으로 모으자는 큰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의 세 학과로 나뉜 서울대를 비롯해 많은 대학에서 지역에 따라 3개의 세부전공으로 학문체계가 분리돼 있어 전공 간 연구방법과 학술용어, 역사 문제의식에서 관심의 결이 다른 실정이다. 이는 학문의 전문화 경향을 반영하나 학과 간 공동 연구와 소통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서양사와 동양사는 주로 사용하는 언어가 영어와 한문으로 상이하게 다르며, 사용하는 용어의 차이도 크다. 또한 같은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가 다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나키즘’(anarchism)은 서양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후 기존의 전통, 가치, 정치체계 등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와 반항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것이 1900년대 초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획득해 한국의 아나키즘은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된다. 유럽 및 미국 역사학자가 사용하는 아나키즘이 국가와 정부 권력에 대한 저항과 혁명 의지라면, 국사학자가 사용하는 아나키즘은 일제에 대한 민족해방 의지가 담겨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보완하고 하나의 역사학계가 주체로 서는 사전 편찬을 위해 『역사용어사전』 편찬팀은 원고를 다른 영역 전문가들과 토론하는 비교사 집담회를 개최해 학과별 소통을 늘렸다. 또 같은 표제어라도 각 전공에서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면 이를 개별적으로 기술해 개별 전공의 연구를 공유했다. 최갑수 교수는 “3개 사학과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떠오른 것이 바로 『역사용어사전』이었다”며 “용어의 통일을 할 수 있으면 통일을 하고, 잘 되지 않는다면 학계의 현실을 그대로 사전에 반영하자는 취지 아래 사전 편찬을 시작했다”고 편찬 사업 초기를 회상했다.

이렇게 3개 사학과의 연구를 한 데 모은 우리나라 역사학의 정수가 『역사용어사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역법’의 경우 서술 내용에서 모순되는 부분이 있음에도 한국, 동양, 서양의 기술을 모두 병기했다. 또한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역사용어인 ‘자본주의 맹아론’ ‘개성 상인’ 등이 수록되기도 했으며, 베트남 전문가가 서술한 베트남의 ‘과거제’도 동양사, 국사와 독립적으로 서술됐다. 한국 사학계의 현재 역량을 고스란히 담다 보니 우리나라에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역사 전공자가 많지 않아 관련 내용이 누락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역사용어사전』은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축적해온 연구 성과를 하나의 책으로 모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사전 편찬팀 전임연구원이었던 최진묵 HK연구교수(인문학연구원)는 “국어사전이 아니니까 자기가 찾는 게 없을 수도 있다”면서도 “해방 이후 우리 주류 역사학계가 어떤 연구를 해왔는가, 그 경향과 성과를 보여주는 성격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역사학계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다

『역사용어사전』은 과거의 연구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 한국 사학의 연구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대표적 사례인 ‘전염병’ ‘젠더’ 등의 표제어는 기존 역사학에서 다루지 않았던 신사학(新史學) 용어이다. 전염병, 젠더는 의학과 사회학의 용어로, 정치, 외교, 군사에 중점을 둔 기존 사학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분야다. 하지만 사전에서는 현재 사학 연구 경향을 반영해 이집트에서 시작된 천연두의 역사,『삼국사기』에 실린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역병, 중세 유럽을 공포에 빠뜨렸던 흑사병 등을 다루면서 전염병이 역사 속에서 인간 사회에 미친 영향을 고찰한다. 또한 사전은 젠더를 역사분석의 유용한 범주로 보고, 르네상스 시대 여성혐오주의부터 2000년대 LGBT 운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관점에서의 역사 해석을 보여준다.

사전 편찬을 통해 사학계는 70년의 한국 역사 연구를 한 데 갈무리해 그동안 세계 학계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한국 역사학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한다.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역사학자와 그들의 연구 성과가 많으나 아직까지 세계 역사학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해 중국이나 일본에 미치지 못한다. 이에 사전은 한국의 역사학을 세계학계에 제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려고 한다.

‘호한체제론’(胡漢體制論) 표제어는 그 노력의 대표적인 사례다. 호한체제론은 박한제 명예교수(동양사학과)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이론으로, 위진남북조시대 호족과 한족이 중국에서 하나의 통치체제 안에서 병존하며 하나의 문화체제를 형성해가는 현상을 지칭한다. 이론의 핵심은 한족과 비한족이 서로 모순과 갈등을 겪으며 상대를 인정하는 공존관계로 변화해 수와 당으로 이어지는 대제국 형성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는 박한제 명예교수가 최초로 제시한 이론으로 중국과 세계 역사학계에서 인용될 정도로 그 성과를 인정받고 있으나 널리 보급되진 못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었다. 사전 출판을 계기로 이같은 한국 사학계의 성과를 알릴 수 있게 됐다.

편찬팀은 앞으로 『역사용어사전』의 번역과 E-Book으로의 확장을 생각하고 있다. 최진묵 HK연구교수는 “이 사전을 영어로 번역하고 인터넷으로 쉽게 접할 수 있게 만든다면 일반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역사 연구자들도 볼 것”이라며 “우리나라 역사학을 널리 알릴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역사용어사전』의 간행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전이란 계몽의 정신 내지 시대의 산물이다.” 포괄적 지식의 습득이 개인적 세계관 형성에 불가결한 토대라 믿는다면, 정보의 총체로서 사전의 제작은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다.『역사용어사전』 편찬으로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우리의 역사사전 편찬 작업. 앞으로 한국 역사학이라는 집에 우리말, 우리 생각으로 만든 ‘세계로의 열린 창’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자. 

 

사진 1 : 지난달 30일 출판기념회가 끝난 뒤 최갑수 교수(서양사학과, 왼쪽에서 세 번째)와 『역사용어사전』 편찬팀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2 : 서양사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서술한 본문내용. 각 표제어 끝에는 참고문헌 목록이 수록됐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