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몽과 자학 사이
백일몽과 자학 사이
  • 대학신문
  • 승인 2015.04.12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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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열 교수
사회학과

칠순. 일제 강점기 제국대학과 각종 전문학교들을 합쳐 국립대로 출발한 서울대의 나이입니다.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들을 관악산 기슭에 모아 명실상부한 종합캠퍼스를 마련한 때부터 따져도 만 40년입니다. 긴 연륜에 걸맞게 서울대는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 거듭났습니다. 넓은 캠퍼스는 풍부한 녹지를 끼고 여유롭게 펼쳐져 있습니다. 한국적 전통미와 탈현대적 파격미가 조화된 건물들이 어우러진 캠퍼스는 그 자체로 그림입니다.

신입생들은 대학본부 앞 넓은 잔디 맞은편 기숙사에서, 2학년부터는 관악산 산록 20개 기숙사에서 졸업 때까지 함께 생활합니다. 동서양의 고전과 기초학문을 중심으로 통섭적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졸업하기 직전 자신이 수강한 학점을 따져서 전공을 선언하지만, 별 의미는 없습니다. 진짜 전공은 다양한 전문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교수들은 소속 학과에서 강의를 개설하지만, 공동연구는 교내에 흩어져 있는 20여개의 주제별 연구소에 소속되어 진행합니다. 저는 사회학과에서 조직론을 강의하지만, 연구는 아시아연구소에 소속된 역사학자, 중문학자, 인류학자, 경영학자, 일본정치 연구자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사회발전모델에 관한 비교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각국의 방대한 경험적 자료가 축적된 데이터 아카이브는 아시아에 관심을 가진 모든 학자들이 부러워하는 인프라이자, 전 세계 사회과학자들이 활용하는 서울대의 자산입니다.

응용학문으로 선두에 선 단과대학들은 세계 최고수준의 연구비를 확보했으며, 간접비의 1/3은 기초학문의 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됩니다. 덕분에 법인화 이후 서울대는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이 조화롭게 발전한 모범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아, 그런데 죄송합니다. 소망이 간절한데 현실이 녹록치 않다보니 제가 백일몽을 이야기했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서울대는 아직 ‘연합대학’입니다. 한 곳에 모였지만 정체성부터 제각각입니다. 대한제국 시대부터 최근에 설립된 학부까지, 충적의 연륜이 다르고, 정체성의 농도 또한 다릅니다.

서울대 캠퍼스는 비동시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의 전형입니다. 관악산에 올라 무질서하게 들어서고 있는 울창한 건물 숲을 내려다보면 계획과 조정 기능이 사라진 열대림이 떠오릅니다. 규모는 세계수준인데, 건물의 입지나 외양은 닥치는 대로 빈 공간을 먹어치우며 팽창하는 판자촌처럼 느낍니다. 인접한 단과대학들을 등지고 중정을 껴안은 모습으로 들어선 한 단과대학의 신축건물은 자폐증 분위기마저 풍깁니다. 14동 옆에 15동이, 17동 옆에 18동이 있을 거라는 상식을 믿었다가는 바보가 되는 곳입니다.    

단과대학마다, 때론 학과마다 만든, 그러나 대부분 비어 있는 국제회의실이나 세미나실들을 보면, 옛 사회주의 경제체제하 연성예산제약(soft budget constraint)에 따른 물자확보 경쟁이 떠오릅니다. 신축건물은 넘쳐나는데 학기마다 강의실 배정은 전쟁터입니다. 공유경제시대에 공유개념이 없는 캠퍼스지요.

명색만 유지되는 기초학문 진흥정책, 광역으로 모집은 했으나 광역의 교육은 없어 학과제로 되돌아간 통합적 교육의 실패, 학문적 공공재를 함께 만들어내지 못하는 학과 및 단과대 이기주의, 건물 올리고 명패 붙일 돈은 넘치지만, 소프트웨어를 운영할 지원금은 고갈된 기형적 발전기금, 연구비가 끊기면 인력도 아이디어도 흩어져 버리는 취약한 연구소 구조, 대학 간 높은 단절의 벽.

아, 다시금 죄송합니다. 이번엔 너무 자학적으로 현실을 그렸네요. 제가 가르치는 조직론 교재에서 마치(J. March)는 대학이 조직화된 무정부상태(organized anarchy)의 전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창의적이고 혁신적 아이디어도 나온다는 역설이지요. 그러니 너무 자학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아쉽습니다. 지나고 보니 참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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