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성훈 강사
철학과

 캠퍼스에 봄이 왔다. 내가 ‘귀요미’로 불린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 제자 덕분에 알게 된 페이스북 서울대 대나무숲에도 봄이 왔다. 숲에는 외로움에 울부짖는 청춘여남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특히 대상도 없이 그냥 연애하고 싶다는 글들을 보고 나는 20여년 전 꽃피는 캠퍼스의 저 많은 여학생들 중 왜 나의 짝은 없는지 한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대나무숲 같은 게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여자 후배들아 너네들 내가 열심히 투쟁한다고 존경하지만 말고 연애 좀 걸어봐라”고 썼을 것 같다. 물론 실명 공간에서는 철학의 근본문제와 민중해방의 길을 모색하는 모습만 보여주려고 도도한 행태를 지속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도도함과 찌질함 사이를 오가며 몇 차례 용감한 대쉬와 처절한 좌절을 맛본 후, 내 이상형에 가깝고 내 여러 가면(persona)을 충분히 존중하는 여인과 동지적 연애를 거쳐 결혼에 이르렀다. 물론 결혼 후 동지는 간 데 없고 마누라와 애들만 남았지만.

내가 연애 못해 안달이 난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구체적 대상에게 몰입하라”와 “연애는 자기의 재구성”이다. 우선 대상 없는 연애욕은 소유욕이거나 성욕일 가능성이 크다. 남들이 가진 걸 나도 갖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된 연애는 몰입하기 힘든 대상에 대한 소유권을 지키려다 피로감만 커진다. 그리고 자기성장 없이 계속 신상품을 사려는 습관으로 이어지기 쉽다.

두 사람이 힘의 균형을 잃지 않은 채 서로에게 끌리는 일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일방성이 큰 연애나 몰입 없는 썸타기를 쉽게 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들이 나와 파트너의 관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체험, 유일무이하고 비교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몰입은 결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다. 물론 훗날 돌이켜보면 “왜 그땐 그랬는지 몰라”라며 웃게 되지만 그 경험은 연애 이외의 다른 사회적 관계에서는 얻기 힘들다.

연애는 달콤한 고뇌요 쓰라린 환희라는 역설의 체험이다. 구체적 대상에 대한 몰입이라면 짝사랑만으로도 이미 이런 체험은 가능하다. 짝사랑을 연애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다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절망적 과업이요, 타인이라는 벽에 부딪쳐 자기중심적 세계가 몰락하는 경험이다. 본격 연애가 시작된 후에도 절망은 수시로 닥쳐온다. 서로에게 동시에 몰입했던 두 사람이 시차를 두고서 파트너에게 더 다가설 수 없음을 느끼며 소통 불가능성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소라의 노래처럼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아무리 사랑해도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이때 사랑의 지속 여부는 자기 재구성의 결과에 달려 있다.

짝사랑이 이미 자기 재구성의 시작이다. 나를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로 가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를 지워버리면 노예가 된다. 특히 내 존재의 파괴를 초래할 수 있는 파트너의 요구를 수용해선 안 된다. 건강한 나를 더 사랑하기 위해 운동 좀 하라는 잔소리는 수용해도 되지만 날씬한 다른 것들과 비교하면 그것들과 연애하라고 답하라. 섹스할 때 감촉 안 좋다고 콘돔 빼고 사정하는 놈과는 당장 헤어져라. 다소 쓰라린 변화지만 그걸 성숙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사랑을 통한 자기 재구성이 이루어진다. 못 먹던 음식을 먹게 되고 낯선 음악을 듣게 되고 등등의 변화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쓰라린 환희여야 한다.

여기까지 읽은 청춘은 아마도 내게 “꼭 그렇게 힘들게 연애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답하자면, 그런 연애 한번 안 해봐도 잘 살 수 있다. 애인 없다고 취직 안 되는 것 아니고 연애 안하고도 결혼할 수 있다. 내가 말한 열정적 사랑은 3~400년 정도의 역사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열정과 낭만의 공식에 따라 근대인으로 살아왔지만 여러분은 이미 포스트모던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연애 안 하고 있다고 해서 기죽지 마라. 연애 못한다는 생각만 버리면 된다. 다만 타인에 대한 몰입에서 비롯하는 절망감과 자기 직시, 그리고 그걸 극복하기 위한 자기 재구성의 경험은 연애가 아니면 쉽게 얻기 힘든 성숙의 기회라는 것이 나의 근대적 경험에 따른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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