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천아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나는 그들의 고통이 무고하다고 생각했다. 몹시 화가 나기도 했다. 그날 무고한 고통을 받는 이들을 보고 슬퍼했었지만 그날 느꼈던 연민의 감정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내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미안하다는 감정에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벽이 느껴졌다.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 일에 ‘책임’을 느낀다고 한다. 이 일에는 규명해야 할 진상들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밝혀야 할 진상에는 선장을 포함한 선원, 해경, 관료, 국정원 그리고 대통령의 행적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규명되어야 하는 진상은 명백해 보였고, 진상이 밝혀진 이후 해결되어야 할 문제 중 내가 혹은 그 사람들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일어나선 안 되는 이 참사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다양한 원인이 제기되었지만 누군가가 선장에게 혹은 유병언에게서 멈추었듯이 나는 신자유주의쯤에서 멈추었다. 선장 혹은 유병언에게 멈춘 사람은 이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할 수 없는 큰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고, 내가 바꿀 수 없는 무엇이라 생각했고,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생각은 멈추었지만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불편함은 계속되었다. 나는 왜 그들을 불편하다고 느낄까? 책임을 느끼는 그들은 이 문제가 세월호 유족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의 문제고 우리의 문제라고 말한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진상을 반드시 규명하겠다고,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도 이성적으로는 그들의 고통이 훗날 내 고통이 될 수도, 그 고통이 발생하게 된 구조에 내가 책임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겠다. 고통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나 머리로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연민의 감정이 미안한 감정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느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패하고 있다고 여기며 냉소하기도 했다. 

어쩌면 냉소는 편해지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구조적 문제라고 냉소하면서 점점 세상의 문제에 벽을 쳤고, 그 속에서 안전한 나의 일상을 구축할 수 있었다. 냉소하면서 내 현실에 몰입할 수 있었지만 부당한 현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비판하면서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당장 내일 처리해야 하는 내 삶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고, 나의 무고함에 대해서도 생각했지만 불편함이 해소되진 않았다. 

만약 이 불편함이 나에게 미안함으로 나아가기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미안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타인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여겨 책임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세상은 지속적으로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많은 비리와 구조적 문제가 남아있는 것만큼이나 많은 문제가 해결됐음도 잘 안다. 불가능한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않는 한 남아있는 문제가 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불가능’에 초점을 맞추고 냉소하는 나와 달리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어온 역사를 바라보며 더 낫게 실패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니 바뀌지 않고, 바뀌지 않으니 바꿀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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