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종태 교수
화학부

우리 대학원생들을 놓고 ‘학문후속세대’라고 부르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일종의 ‘유피미즘’(euphemism)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명실상부(名實相符)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문후속세대라는 말 자체를 곰곰이 뜯어보면, 그 속에는 사실 명제와 당위 명제가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대학원생은 장차 우리나라 학계를 이끌어 갈 주역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사실 명제이다. 그 말 속에는 당위적 함축도 있는데, 대학원생들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을 학문적으로 잘 교육하고 또 그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것이 학교, 정부, 기성 학문 세대의 책무라는 것이다. 필자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이 그 두 가지 명제에 대해 굳이 부인하거나 반대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문후속세대라는 말이 유피미즘으로 들리고, 심지어 적지 않은 이들에게 냉소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명제로서는 그 진릿값이 참이 아니고, 당위 명제로서는 공언(空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사실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 오랜 시간 온갖 역경을 이기고 한국의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대학원생들이 ‘유수의 외국 대학’ 학위 소지자들을 제치고 대학 교수와 연구소 연구원이 될 가능성은 얼마일까? 우리 학계의 가까운 미래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합리적 가정에 따른다면, 그 질문에 긍정적 전망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 학문의 ‘실제’ 후속세대가 될 이들의 상당수가 현재 서울대를 비롯한 한국의 대학이 아니라 외국의 유수 대학에서 학위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학부를 졸업하거나 석사를 마치고 유학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학생들이 유학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국내에서 학문후속세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유리한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한 데는 ‘미국 박사’를 선호하고 영어 능력을 중시하는 한국 학계의 전반적 풍조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 내부로 눈을 돌려보면, 앞서 언급한 ‘당위 명제’가 말 그대로 ‘당위’로 언급되는 데 그칠 뿐 실제로 잘 지켜지지 않은 것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분야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보자면 우리 학교의 대학원생들은 외국의 유수 대학에 비해 학문적으로 고급의 교육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걱정 없이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도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박사과정 수년 간 등록금과 생활비를 크게 걱정하지 않고 공부하는 미국 유수 대학의 대학원생 자리와 매 학기 수백만 원의 등록금을 내야 될 뿐 아니라 교수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기타 부업 활동을 통해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한국의 대학원생 자리. 그런데 후자의 경우 혹 제공받는 교육의 질조차 그리 높지 않다면, 학생들의 입장에서 과연 무엇이 합리적 선택일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일 것이다.

학생들에게 해외 유학을 권장한다거나 또는 반대로 국내에서 학위를 받은 이들을 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능력 있는 대학원생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우리 대학이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학교의 교수들이 스스로 연구자로서 모범을 보이고 학생들을 성심껏 가르쳐야 되겠지만, 학교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합리적 정책을 세우는 일도 중요하리라고 생각한다. 법인화 이후 기초학문 전공의 박사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금이 생긴 것으로 알지만, 그 규모가 너무 작아서 과연 의미 있는 효과를 내고 있는지 의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적어도 모든 박사과정 학생이 등록금과 일정 기간 생활비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학원생을 정말로 학문후속세대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걸맞은, 의미 있는 지원책이 강구돼야 한다. 그들을 정책적으로 방치하고 있는 현 상황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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