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수정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

얼마 전 지난해 성추행 혐의로 고소된 강 모 교수의 파면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대 교수가 성범죄로 구속기소된 것도 이번이 처음인 데다 파면된 것 또한 이례적인 일이라 하니 오히려 이제까지 대학 내, 특히 대학원 내에서 권력관계를 등에 업고 자행되는 크고 작은 성추행 사건들이 제대로 문제시된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경악할 만한 일이다. 그나마 유명 TV 시사고발 프로에서도 이 사건이 다루어지고 학내 다른 성폭력 사건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활발해지는 등, 그간 억압되고 침묵 되어온 이 문제가 적극적으로 공론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까.

강 전 교수와는 나도 짧지만 강한 기억이 있다. 학생들과 축구를 즐기고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젊은 교수의 인기는 학부 시절 수강생 백 명이 족히 넘는 강의 한 번을 들은 게 고작인 내게도 명성이 자자했지만, 그가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긴 것은 그 학기가 끝나고도 몇 달이 지난 뒤의 일이다. 우연히 마주친 그는 내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고, 인사를 받자마자 천연덕스럽게 눈을 흘기며 ‘일부러 모른 척하다니 나한테 이렇게 서운하게 굴기냐’며 농을 던졌다. 딱히 누구에게 하소연할 만한 일도 못 되는 이 사소한 만남에서 내가 느낀 불편함을 언어화하기가 지금도 이토록 어려우니 그 당시의 막연한 답답함은 이제 와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교수-학생 간의 성폭력이 쉽게 공론화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를 대학(원)생의 학내 안녕이 교수와의 원만한 관계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찾는다. 학위를 취득할 때까지는 다른 곳으로 도망치기도 어려운 폐쇄적인 환경에서 교수라는 절대적 갑의 요구에 을인 학생은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런데 피해자들의 두려움과 불안이 단순히 교수가 가할 수 있는 불이익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강 전 교수처럼 학생들과 ‘지나치게 격의 없는 교수’라는 이미지로 무장한 경우는 더 그렇다. 그의 추문이 공론화되기 전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던 한 동료 교수가 그를 두고 한 표현이다. 학생과 허물없이 지내기로 유명한 교수의 친근함을 빙자한 사적 침해에 대한 고발은 도리어 피해자 학생의 과민함으로 여겨지기에 십상이다. ‘지나치게’ 스스럼없고 철없다는 식의 수사가 동반될 때는 더 곤란하다. ‘실수’에 취약할지언정 ‘악의’는 없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피해자는 더욱 말할 용기를 내기 어려웠을 게 틀림없다.

강 전 교수는 공판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그저 잘 해주려 했을 뿐인 자신의 행동이 ‘오해’와 ‘배신’으로 돌아온 것에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고 한다. 선처를 호소하며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서투르고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한 것뿐이라며 변을 늘어놓는 그 모습은 구차하기보다는 조금은 소름이 돋는데, 자신의 문제적 행동들이 전적으로 선의에서 비롯했다는 논리에 가장 깊이 설득되고 매료되어 있는 것이 바로 강 전 교수 본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허나 이러한 자기 정당화를 가능케 하는 배경에는 개인에 대한 침해와 폭력의 단초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취급하도록 회유하는 자유로움을 가장한 억압이 있다. 결국 교수사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보다 기민한 감수성이 요구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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