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박목월 탄생 100주년 - 중기 시선들을 중심으로 서술한 박목월 시세계

▲ 박동규 명예교수
(국어국문학과)

박목월 시인과 시에 관한 글을 청탁받았을 때 한동안을 망설였다. 나는 박목월 시인의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이 혈연적 인연이라는 것이 박목월 시인과 시편들을 학술적이거나 혹은 비평적 시각에서 주관적인 관점에서 서술해나가게 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대학신문』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젊은이들에게 한 시인의 전모를 바라보는 데 주관적인 나의 관점도 연구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겨서 박목월 연구의 초보적 접근의 다양성을 열어주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먼저 밝혀둔다.

박목월 시인은 1939년 『문장』에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길처럼」 「나그네」 등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어 등단하게 된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이 된 후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같은 『문장』지 출신인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삼가 시인의 시집 『청록집』을 발간했다. 이 『청록집』의 발간을 계기로 목월 시인은 해방공간의 한국시단의 중심적 자리에 서서 활동을 하게 된다. 일제 암흑기인 1939년에서 해방되던 1945년 사이는 박목월 시인이 경주에 살고 있었다. 박목월 시인이 『문장』지에 첫 작품이 실리던 때 내가 태어났다. 조지훈 시인이 박목월 시인을 찾아와 「완화삼」을 목월 시인에게 주고 또 둘이서 반월성을 다니며 함께 며칠을 보내고 답시로 「나그네」를 썼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목월 시인은 경주시내 어느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았다. 내 어머니는 그 당시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밤이면 밥상을 행주로 깨끗이 닦아 방 안에 놓으면 아버지는 지금의 포장지 같은 한 쪽만 매끈한 전지를 가위로 잘라 원고지 크기만큼 만들어 이 종이 위에 연필을 깎아 시를 썼다고 했다. 그리고 새벽이면 아버지는 이 원고를 묶어 마루 밑에 감추어 두곤 했다고 한다. 이 일제 암흑기의 시대상황이 『청록집』과 연결되는 것은 민족적 시어의 창출과정이나 자연에의 몰입이라는 시적 성향의 저변이 되고 있다. 실제로 『청록집』에 실린 박목월의 15편 시는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유종호 교수는 박목월 초기 시의 특징으로 서정시의 고유성에 충실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했다. 그가 지적하듯이 서정성의 고유성은 민족정서의 기본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 서정시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박목월의 초기 시는 한국시조에서 이조년의 시조가 보여주는 음풍농월의 세계를 이룬 이 서정성의 궤적에 자리하고 있어서 새로운 서정시의 민족적 시가정신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해방공간에서 민족적 서정의 정통성을 보여준 시로 박목월의 초기 시가 자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를 필두로 「달무리」 「연륜」(年輪) 「산이 날 에워싸고」 등은 배제와 집중의 시학을 기초로 하여 이미지의 정교한 조합을 거쳐 ‘성취된 서경’(敍景)(유종호)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특히 「임」이라는 시에서 보여주는 ‘기인 밤 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 어느 날에서/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에서 ‘가는’이라는 어휘가 간다는 뜻이 아니라 ‘갈다’라는 의미라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어디로 가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오류이다. ‘콩을 맷돌에 갈다’에서 쓰는 ‘갈다’의 변용으로 ‘가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의미가 옳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비로소 바위를 갈아서 반짝거리게 하여 임과 하늘이 비치는 표현으로 완벽한 간절한 그리움의 형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구사를 통한 의미범위의 깊이는 바로 한국시의 언어체계를 서정을 수용하는 확대된 내포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여겨진다. 또 다른 여러 요건이 드러나 있지만 이 때문에 박목월 시인의 초기 시가 해방공간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대시의 전형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그네」 등의 초기 시가 워낙 강렬한 시적 견고성과 감동성을 지녔기에 박목월 시인이 40여년 넘게 시작(詩作)생활에서 보여준 시편들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단편적일 수 있었다는 견해가 학계에 정설이 되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이남호 교수는 박목월 시인의 시세계를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청록집』과 『산도화』의 시편이 보여주는 보랏빛 미학공간’이다. 상상속의 자연을 노래하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창조한 시기이다. 둘째는 ‘일상에 대한 내면적 성찰’이며, 그는 이 시기를 ‘시인이 가장 오래 많이 머물렀던 공간으로 박목월 시세계 가운데 가장 풍요롭고 중요한 시기’라고 하면서 ‘시인의 나이 44세 때 펴낸 시집 『난 기타』는 박목월 시력(詩歷) 가운데 있는 시집이지만 그 이전 이십 년보다 그 후 이십 년 동안 훨씬 많은 작품을 남겼고 수작도 많다’고 하였다. 셋째는 『경상도의 가랑잎』에서 보여준 ‘순박한 사투리와 토속적 미학의 세계’를 들고 있다. 그리고 넷째로 아름다운 영혼의 미학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였다. 박목월 시인의 일생을 네 가지 단계로 나누어 보여준 이남호 교수의 길을 따라간다면 『난 기타』 이후 『청담』에 이르는 중년기의 시편이 박목월 시세계가 왕성한 절정기의 작품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가 되고 있다. 이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일생의 시작(詩作)에 전념하며 보낸 많지 않은 시인만이 한국시문학사에 남아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한 시인의 일생 시편들 속에서 그 변화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시인의 시편들을 해독하기 위해서 필연적 과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1964년에 발간된 『청담』(晴曇)이라는 시집의 첫 번째 시가 「가정」이다. 자연과의 교섭을 통해 그가 기대고 숨 쉬던 상상적 공간이 가정이라는 생활공간으로 옮겨온 것을 보여주는 전기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정」이라는 시에 관한 내용을 보기 전에 박목월 시인이 처한 현실적 공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박목월 시인은 가족(어머니와 12살 된 나 그리고 6살 여동생, 2살 된 남동생)을 서울집에 남기고 혼자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국군이 9월 25일이 지나 서울을 수복하고 겨우 한 달쯤 지나서야 서울로 올라와 가족과 합쳐지게 되었다. 이 전란의 상흔은 우리 가족에게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12월이 지나 1월 초 다시 피난길에 나서서 트럭 짐 안에 실려 대구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대구에서 삼 년 넘게 지내다가 서울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십 년간 우리 가족은 폐허화된 서울 거리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 넷째 동생과 다섯째 동생이 태어났다. 돌이켜 보면 목월 시인은 우리 다섯 형제의 학비조차 벌기가 어려웠던 시기였다고 기억된다. 목월 시인의 개인사적 측면에서 보면 신라의 고도였던 경주의 심오한 자연의 공간이 서울의 폐허 위에 생존의 갈등을 담은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서정적 자아의 형상을 시로 녹여내는 일이 바로 그의 시세계의 새로운 탐색이라는 실험적 응대를 가지게 한 것이라고 사료할 수 있다. 「가정」은 이런 소재적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내 개인적 관점이지만 「나그네」에서 「가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한국시의 발전과정과 연결되어 있고 박목월 시의 생활시적 성향은 아직도 많은 이에게 열려있지 않은 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생전에 다섯 권의 시집만을 엮어내면서 그중 『난 기타』와 『청담』에 이르는 과정속에 숨어있는 시편들은 박목월 시인에 관한 연구의 가장 핵심적 의미체를 찾아낼 수 있는 보고가 될 것을 기대하며 「나그네」 이후 한국시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줄 시편들이 숨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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