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의 일과는 전선이 연결된 기계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간의 외형을 재현한 로봇을 만들어 인간의 기억과 사고방식을 학습시키는 실험이다. 박사의 전문 분야는 로봇의 인공 지능이다. 로봇의 뇌가 될 큰 틀은 이미 완성되었고, 그 안에서 구체적인 사고 흐름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남았다. 로봇이 인간의 사고를 재현할 수 있으려면 실제 인간의 기억과 사고과정을 주입함으로써 예시를 통해 학습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박사가 아침부터 머리에 전극을 꽂고 의자에 기대앉아 있는 이유이다.

연구실 안은 박사의 사고를 방해하지 않도록 정갈하고 조용하다. 발소리나 의자 끌리는 소리 같은 사소한 소리도 예방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슬리퍼와 접이식 의자를 사용한다. 그러나 복잡한 사고가 아니라 기억을 떠올리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간단한 과정이기 때문에 자잘한 소리 정도는 들리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라면 의자가 상당히 편안하므로 그대로 잠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정도이다.

로봇은 정면에서 보았을 때 기계 오른쪽 거치대에 세워져 있다. 로봇의 생김새는 박사와 빼닮았다. 로봇이 주입받을 기억의 주인공이 정해지자 디자인 팀에서 마련한 작은 서비스이다. 눈을 감고 있다는 것 역시 로봇과 박사의 공통점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굳이 눈을 감겨두지 않았으나, 미관상의 문제로 인해 변경되었다. 깜박이지 않는 눈을 뜬 상태로 세워 두었을 때 영문 모를 오싹함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사는 머릿속에서 초등학교를 보고 있었다. 교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에 모래 놀이터가 있었다. 타이어가 줄줄이 묻혀 놀이터를 테두리 쳤다. 아이들이 타이어를 길 삼아 차례대로 밟으며 놀았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걷는 아이들이 마주칠 때마다 가위바위보를 했다. 박사의 시야가 타이어 위에서 제일 친한 친구와 마주쳤다. 가위바위보를 이기자 친구는 타이어에서 내려섰다. 의기양양하게 타이어 길을 걸어가면서 웃었다. 현실 속 박사도 웃음을 짓는다.

로봇이 눈을 뜨면 자신도 어린 시절 타이어를 밟고 놀았다고 기억하게 될까?

달콤한 기억을 간섭하는 익숙한 날선 사고에 박사는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로봇은 박사의 모든 삶을 사사건건 학습하는 중이다. 자신을 본뜬 존재가 기억과 행동을 그대로 베끼고 있다. 박사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몸을 뒤척인다. 타이어는 놔두고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다른 기억으로 옮겨간다. 연구 과정에 대해 사적인 감정으로 불평할 수는 없다.

박사의 일과는 전선이 연결된 기계에 앉아 로봇을 지나치게 증오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현장 시찰이 있은 날, 박사의 일과는 약간 변화를 겪었다. 시찰단이 실험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연구실 분위기는 정돈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박사가 기계에 앉아있는 모습은 가장 시각적으로 인상 깊은 장면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되었지만, 평소처럼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박사로서는 별다른 불만은 없는 날이었다.

현장 시찰 후 인공지능 측은 잠시 실험 진행을 멈추었고, 디자인 팀과 외형 제작 팀이 한동안 분주했다. 결과물이 공개된 아침, 연구실에 들어서던 박사는 보이는 광경에 놀라 그 자리에 걸음을 멈췄다. 로봇의 생김새가 박사의 젊은 시절을 본떠 새로 바뀌어 있었다. 박사는 디자인 팀 사람을 붙잡고 왜 굳이 외양을 바꾸어야 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시찰 후에 지시가 내려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시를 내리는 사람 중 누군가가 이 연구에서 ‘영원한 젊음’의 실마리를 본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박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짓이다. 외양과 행동을 모방한다고 해서 로봇이 원본 인간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로봇의 외양은 실제 모델 없이 과거의 모습을 따라한 것임에도 감쪽같았다. 디자인 팀에서 박사의 대학 시절 사진을 상당량 입수한 모양이었다. 박사는 자신에게 귀띔 없이 사진을 수집하고 로봇 성형 과정을 진행한 무례에 대해 따지기로 마음먹었다. 로봇을 바라보다 박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로봇의 팽팽한 피부와 풍성한 머리숱은 마치 자기가 박사 대신 회춘을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봇이 회춘한 이후, 박사의 오전 일과는 그다지 평화로운 기분으로 시작하지 못했다. 연구실 문을 열고 젊은 로봇을 마주할 때마다 박사는 불쾌한 기분에 헛기침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이전 모습이 나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젊은 연구원 둘이 점심 메뉴 후보로 순대볶음을 소곤거리고 있는 것을 지나쳐 기계에 앉아 준비를 시작했다. 로봇의 외양이 바뀐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요새 박사의 사고는 유난히 젊은 시절을 헤매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지 궁금해 하며 박사는 눈을 감았다.

박사의 식판 맨 오른쪽 반찬 칸에는 순대볶음이 놓여 있었다. 앉아있는 장소는 고등학교 급식실이었다. 눈앞에 앉은 친구가 순대볶음에 대해 썰렁한 농담을 하는 것을 듣고 욕을 해주었다. 1학년 때부터 친했던 친구였다. 학년이 바뀌고 반이 달라져서도 여전하게 지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길이 갈리다 보니 연락이 뜸해지다 끊겼다. 이후로는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한번.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는 초조한 기색으로 웃음을 지었다. 근황을 얘기하던 친구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박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박사의 대답에 친구는 얼굴이 일그러지다가 그 기색을 숨기기 위해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발을 접질려 절름거리는 듯한 웃음을 계속 유지하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절름거리는 웃음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본 적이 있었다. 사귀던 애인의 마지막 표정도 절름거리는 웃음이었다. 이 기억에 도달한 박사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애인이 그 표정을 지으며 떠나가기까지 박사가 잘못한 일이 많았다. 박사는 젊은 박사의 따귀를 갈기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색하고 슬픈 표정을 짓게 만든 것은 친구나 애인이 다가 아니었다. 박사는 어머니가 그 표정을 지으시도록 만든 적도 있었다.

로봇이 눈을 뜨면 자신도 절름거리는 웃음을 목격했다고 기억하게 될까?

박사는 눈을 뜨고 진저리를 쳤다. 부끄럽고 혐오스러워서 덮어두고 살던 젊은 시절 기억들이었다. 박사는 로봇이 불쾌하고 증오스러운 이유가 단순히 로봇이 박사를 복사하고 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이유는 로봇이 복사하는 박사의 존재 중에서도 덮어두고 있던 어두침침한 부분과 관련이 있었다. 남이 알아선 안 될 부끄러운 생각,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 박사가 증오하는 자기 자신을 로봇은 모두 갈무리해서 따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로봇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일과가 끝난 후, 박사는 바로 떠나는 대신 가만히 서서 로봇을 바라보았다. 로봇은 눈을 감고 있었다. 서 있는 자세로 인해 잠을 자기보다는 명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 전 깨달음 때문에 감정이 끓고 있던 박사는 스스로의 감상에 코웃음 쳤다. 로봇이 명상이라니, 박사의 어리석음과 가증스러움에 대해서라도 명상하는 것일까? 박사는 눈 앞 무차별적인 모방꾼을 쏘아보았다.

로봇을 노려보며 로봇 안에 축적되어 있을 데이터를 저주하던 박사는 문득 그 데이터에 무엇이 저장되어 있을지 생각이 미쳤다. 그가 기계에 앉아 하는 모든 생각은 로봇의 인공지능에 주입된다. 기계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박사는 자주 로봇에 대한 증오를 느낀다. 그렇다면 박사가 로봇에 대해 느끼는 감정 역시 인공지능 안에 켜켜이 쌓여 있을까? 로봇은 눈을 뜨기 전부터 자신의 존재를 증오하고 불쾌해하도록 예시를 통해 학습 받고 있는 셈이다. 박사는 로봇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지만, 그것 때문에 갑자기 로봇이 마음에 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로봇에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주입해서는 안 되지만 로봇을 증오하는 걸 그만둘 수는 없다면, 다른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박사는 시계를 흘끗 확인한 후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갔다.

새벽 세 시 반. 복도 중간 중간 비상구 표시등에서 녹색이 번졌다.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자기를 찾으라는 듯이 자신만만한 빨간 불빛이 소화전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다. 발소리가 났다.

박사는 며칠 간 생각한 끝에 이 밤 귀가하지 않고 연구소에 숨어 있겠다는 결심을 한 참이었다. 자신 말고는 연구소 복도를 돌아다닐 사람이 없으리라 확신이 들 때까지 박사는 숙직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어야 움직일 수 있으니 잠깐 눈을 붙이려 배치된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전날 밤 충분히 잠을 자지 않은 다음날이면 의자에서 번번이 잠들곤 했고, 작업은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면 부족으로 연구를 방해할 일이 없으리라.

박사는 슬리퍼가 겹겹이 쌓인 신발장을 지나 연구실 출입문 락에 카드를 댔다. 이곳의 출입 정보는 경비실에 전달된다. 새벽 세 시 반에 연구 인원 한 명이 연구실로 들어간다는 출입 정보는 이유가 불투명하고 수상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가 달려 올 테지만,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박사의 볼일은 간단하게 끝나있을 것이다.

문을 열자 박사가 매일 아침 몸을 맡기는 기계가 보였다.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로봇이 거치대에 세워져 있었다. 벽에는 접이식 의자가 겹겹이 기대 서 있었다. 박사는 숨을 몰아쉬며 걸어 들어갔다. 연구실에 발소리가 쿵쿵 울렸다. 로봇 코앞까지 다다른 박사는 절박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접이식 의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제 그가 생각한 해결책을 행할 차례다. 박사는 이전에 프로레슬링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고 의자를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접이식 의자를 머리 위로 치켜든 채, 박사는 질식할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크게 웃어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로봇은 전원이 꺼진 채 눈을 감고 거치대에 축 늘어져 있었다. 팔은 타격을 막을 수 없고, 다리는 위험을 피해 달아날 수 없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형상을 한 로봇이 박사의 피를 말리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박사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로봇은 여전히 명상하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박사는 그 상태 그대로 로봇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흰자가 붉게 충혈되었다. 젊은 박사를 흉내 내는 외양이 또렷했다. 로봇이 입을 열게 된다면 박사가 숨기고 싶은 이야기도 함께 새어나올 것이다. 로봇의 행동에서는 때때로 박사의 고집이나 오만함이 보일 것이다. 로봇의 표정은 박사와 같을 것이고, 개중 몇은 박사 본인조차 보고 싶지 않은 표정일 것이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이 로봇은 박사의 모든 점을 닮아 단점마저 차별 없이 이행할 것이다.

복도를 뛰어오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박사는 의자를 든 손을 내렸다. 의자가 바닥에 엎어졌다. 연구실 문이 벌컥 열리기 직전, 박사는 손을 들어 로봇의 머리카락에 살짝 얹었다.

안선희 (국어국문학과·14) /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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