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필 교수
건축학과

1990년대 초반 디지털 정보통신기술이 각광 받으면서 학교건물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등장했다. 강의실에 학생들이 모일 필요 없이 실시간 화상강의가 가능하고, 교재는 전자책이며 과제는 디지털 매체를 사용하여 업로드하면 되니 굳이 큰돈 들여 학교건물을 짓고 관리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회사나 관공서도 마찬가지이며, 백화점 등 상업시설마저도 온라인쇼핑으로 바뀔 것이라 믿었다. 우리가 주고받고 공유해 왔던 거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을 통해 빠르고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비트(bit)의 형태로 대체되며, 그래서 인류 역사를 통해 이제껏 우리 삶을 담아왔던 도시와 건축의 역할은 축소되고 가상의 도시․건축 시대가 열린다는 예측이었다. (윌리엄 미첼 교수의 저서『City of Bits』)

2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물론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술이 우리 삶을 크게 바꾸기는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고 건물은 캠퍼스에 계속 더 들어선다. 상업시설이나 공공건축물도 마찬가지이다. 초고층 건물이 속속 세워지고 세종시에는 엄청난 규모의 정부청사가 자리 잡았다. 왜 그럴까?

첫째, 인간의 아날로그적 사회성 때문이다. 오가는 정보가 아무리 편하게 디지털화 되어도 학교나 직장에서, 길이나 광장에서, 또 시장에서 의도적으로나 우연히 만나 얼굴을 마주하고 실제 목소리와 표정, 몸짓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과 교류를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둘째, 건축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다. 고대 피라미드에서부터, 로마 성베드로성당, 프랑스 루브르 궁전, 중국 천안문 광장, 두바이 브르즈칼리파(세계 최고층 건물)에 이르기까지 건축물은 당대의 권력, 종교, 문화, 집단과 개인의 상징으로 작동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근 관악캠퍼스에 중앙도서관 관정관이 신축되었다. 관정 이종환 선생이 600억원을 기부하여 기존 중앙도서관 위에 건물을 하나 더 얹어 국내 최대의 대학도서관을 만든 것이다. 이와는 달리 1990년대 초반 미국 컬럼비아 대학은 200억원짜리 법학도서관 신축계획을 백지화 하고 대신 오래되어 낡은 장서들을 스캔하여 전자책을 만드는 일에 이 예산을 투입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로 칭송 받았지만, 이후 전자도서관이나 전자책은 킨들, 구글 등의 IT 혁신기업들에 의해 너무나 당연하고 흔한 일상이 되었다. 외려 아날로그 도서관이 정보 저장과 열람의 장소로서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의견을 나누고 때론 편히 쉴 수도 있는 새로운 개념의 장소로 변해가고 있다. 디지털 정보야 서버 몇 대로 충분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모이고 교류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다양한 세미나 공간이나 널찍하고 쾌적한 휴게공간을 제대로 갖춘 관정관은 새로운 도서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도서관이 개인의 상징이 돼버린 것이다.

600억원 사재를 기부하는 관정선생은 당연히도 이 도서관 건물이 관악캠퍼스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건물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중앙도서관 바로 옆에 12층 정도의 고층건물을 짓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것이 관악산 조망을 해친다는 여론이 커지자, 중앙도서관 위에 수평으로 올라탄 건물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부자는 랜드마크를 원했고 그래서 우리는 중앙도서관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현란한 입면을 가진 건물을 가지게 되었다. 도서관 건립의 뜻은 좋았지만 그 좋은 뜻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비슷한 일이 우리 관악캠퍼스에 계속 일어나고 있다. 단과대 학장이든 연구소장이든 어떤 식으로든 건축비를 확보하기만 하면, 크거나 작거나 새 건물을 자기 영역 빈 땅에 우겨 넣듯이 지으려고 한다. 이것이 재직 중 실적이요 훗날에는 공적의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교는 5년마다 캠퍼스마스터플랜을 수립한다. 건물의 난립을 막고, 조화로운 이미지를 지키면서도 그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는 일이 없다. 그래서 40년 된 불혹의 관악캠퍼스는 아직도 천방지축 좌충우돌하는 10대 선머슴의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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