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은실 석사
정치외교학부 외교학전공

지난 3월 어느 아동도서 출판사에서 출간한 동시집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10살 초등학생이 쓴 특정 작품은 ‘학원 가기 싫은 날’ 엄마를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먹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잔인한 표현 방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누리꾼들은 이 시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고, 결국 출판사는 이 시집을 전량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대다수 사람들의 심기가 불편했던 이유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아이의 감정적 근원이 사실 우리 사회의 문제로부터 파생되고 있음을 미세하게나마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시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던 사람들은 ‘학원에 가기 싫은’ 아이의 모습에 주목했다. 아이에게 가해지는 학업 스트레스는 그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된 전제였다. 결국 한 편의 동시가 가져온 논란은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로 이해되기보다 ‘왜 아이가 이런 시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한국사회의 병폐를 지적하는 것으로 치환되었다.

학생들은 학업 스트레스로 물든 청소년기를 어떻게든 견뎌내는 것으로 자기 몫을 감당하고 있다. 대부분 비슷한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를 쓴 아이에게 쉽게 감정 이입했고, 사회에 대한 원망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다음은? ‘브로콜리 너마저’라는 인디밴드의 한 노래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작은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은 할 수가 없고, 아니라고 하면 왜 거짓말 같지.” 학업의 고통이 지나고 나면 진정한 행복과 꿈을 논할 수 있는 여유가 찾아올 것이라고 우리는 감히 말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이 단계에서 결국 어른들은 무기력해진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청소년뿐 아니라 전 세대가 현실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20대는 취업이라는 벽 앞에서, 30대는 고용불안이나 결혼이라는 미로 속에서. 이젠 결혼, 연애, 출산에 이어 인간관계와 집, 나아가 꿈과 희망까지 버렸다는 ‘칠포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청년이 중년, 노년이 되어도 여전히 불안사회의 그늘은 현시대를 덮고 있다. 사회는 어느 때보다 풍요롭지만 개개인의 ‘안녕’은 정말 안녕하지 못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위선적인 힐링이 판을 치고, 냉소주의는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다. 온라인상에서 ‘짤’을 통한 참신한 조롱의 코드가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흥미롭게 재생산하고 있지만 결국 일시적인 해프닝에 불과한 소비적 문화로 변질시켜 우리의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게 만든다.

아이는 단순히 학원 가기 싫은 마음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시에 적나라하게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 시를 두고 갑론을박하며 ‘아, 대한민국!’이라 탄식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맞이하는 세계가 앞으로도 병으로 가득한 사회일 것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고, 더 나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위로를 쉽게 건넬 수 없어서가 아닐까. 행복이라는 대안을 말하기 힘든 사회. 아이는 시로 고통을 말했다. 하지만 어른의 대다수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속마음 하나 풀어낼 공간, 혹은 함께 대안을 궁리해 볼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은 채 꽉 막힌 마음으로 견디고 있다. 목적 없는 피로사회에서 꿈과 자유를 허용해줄 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를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허울뿐인, 혹은 이상적인 바람일 뿐인가.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