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개헌 방향에 대한 점검

헌법에서 중요한 것은 기본권 보장

개헌론은 권력구조 개편을 넘어

시민 참여와 꾸준한 논의 통해

사회권과 평등권 증진 목표로 해야

 

다시 개헌론이다. 지난달 18일 여야 의원들과 시민사회단체, 학계, 종교계 등 사회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개헌추진국민연대가 첫 전국대표자회의를 열고 개헌특별위원회 구성을 강력히 촉구했다. 국회 내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도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은 이르면 6월 초 유럽의 정․관․학계 인사들을 초청해 한국과 유럽의 헌법과 선거제도 심포지엄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에는 현재 154명의 국회의원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의 숫자는 헌법 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는 최소 인원수를 넘어섰다.

 

권력구조 개편에 치중한 지금의 개헌론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는 개헌논의는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개헌을 요구하는 일부 국회의원들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심각하다며 분권형 대통령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지난달 17일 CBS 라디오에서 “5년 단임제 이후 들어선 대통령들은 전부 부패에 연루되지 않았느냐”며 “개헌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는 것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권력형 부패를 척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현행 대통령제는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갈리는 승자독식제도다. 게다가 모든 국가기관의 인사권을 대통령이 독점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개헌론자들은 여당은 청와대의 눈치를 보기 바쁘고 야당은 다시 정권을 가져오는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어 국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치권의 주장이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정치의 폐해가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강원택 교수(정치외교학부)는 행정부의 권력을 나누는 분권형 대통령제 역시 만만치 않은 부작용이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원정부제와 유사한 의원내각제를 따랐던 제2공화국은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잦은 갈등으로 실패한 바 있다”며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정부와 의회의 기 싸움으로 에너지 낭비가 심했다”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국회의원들이 제왕적 대통령제 타파를 내세우며 개헌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여겨 봐야 할 것은 개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세력이 새누리당 내 비주류 의원들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대통령 후보를 내기 힘든 이들 입장에선 사실상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것 외에는 권력을 차지할 기회가 없다. 하지만 이원정부제가 도입되면 내정을 책임지는 총리로 선출될 길이 열린다. 국회의원들의 기득권 확대를 위해 개헌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지금의 개헌론이 갖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헌법의 본질인 기본권에 대한 내용은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은 기본권 보장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따라서 개헌 논의 역시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인 권력구조가 아니라 기본권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개헌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것이어야

우리는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의 시대정신을 담은 제9차 개정헌법을 따르고 있다. 정권을 연장하려는 독재정권에 맞서 대중은 거리로 나왔고 스스로의 힘으로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결국 87년 헌법에 담긴 시대정신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독재권력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30년의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헌법에 담긴 시대정신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제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새로운 과제를 마주하고 있지만 87년에 머물러 있는 헌법으로는 복지사회에 대한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김호기 교수(연세대 사회학과)는 “급격한 사회변화를 거치며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데 현행 헌법으로 이를 개선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진단하면서 “변화한 시대를 반영해 헌법에 이미 명시된 기본권을 보완하고 새로운 기본권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헌법상의 여러 기본권 중 사회권과 평등권 증진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회권=사회권은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생활에 필요한 조건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우리 헌법은 사회권으로 보건권, 교육을 받을 권리, 노동 3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등을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해당 헌법 조문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라 사회권을 제대로 보장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헌법재판연구원 김복기 제도연구팀장은 “사회권을 규정한 헌법 조문이 선언적 규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국가에 사회권 이행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사회권을 침해당했을 때 사회권을 규정한 헌법조항으로 구제받기는 쉽지 않다. 사회권을 침해당했다고 인정받으려면 그 내용이 도저히 상식적으로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히 불합리해야 한다. 1994년 생계보호급여를 받는 한 부부가 급여 수준이 최저생계비에 훨씬 미치지 못해 자신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누릴 수 없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기각하면서 시민이 사회권을 근거로 국가에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할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이 사례는 법률로 구체화되지 않은 사회권은 보장받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현행 헌법 조항으로 사회권을 제대로 보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국가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는 자유권과 달리 사회권은 국가에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그런데 헌법에 규정된 사회권은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와 같은 당위적 표현이 전부다. ‘노력할 의무’라는 추상적인 표현만으로 정부에 구체적인 대책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사회변화의 속도에 맞춰 법률을 제정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 선진헌법으로 손꼽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헌법은 기본권의 내용과 국가의 책임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남아공은 2002년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예방약을 일부 산모에게만 제공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에 남아공 헌법재판소는 해당 정책이 ‘국가는 모든 국민이 보건권을 실현하게 하기 위해, 가능한 자원 범위 안에서, 합당한 법률적 수단과 입법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헌법을 침해한다며 위헌을 선언했다. 김영수 교수(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는 “구체적 조문이 부재한 우리 헌법 체계 하에선 해당 정책이 위헌 결정을 받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고 평했다.

◇평등권=평등권은 모든 사람이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고 존엄한 인격체로 존중받을 권리다. 근대 헌법 초기에 차별은 무조건 평등권 침해로 간주 받았으나 최근에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는 상대적 평등을 추구한다.

문제는 헌법에 규정된 평등권 조문으로는 다문화 사회에 맞는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는데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현행 헌법은 평등권을 비롯한 기본권 조항의 주체를 국민으로 한정하고 있다. 김남국 교수(고려대 정치외교학과)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기본권은 국민이 아닌 인간을 주체로 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평등권 규정은 국제적 추세에도 뒤떨어진다. 평등과 차별금지에 대해 명시한 헌법 제11조 제1항은 UN 인종차별철폐협약에서 언급한 차별금지사유 인종, 피부색, 가문 또는 민족, 장애 중 어떤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는 인종차별금지법 공청회에서 “차별금지사유를 확대하기 위해 헌법에 명시된 차별의 정의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와 달리 독일 헌법은 기본권의 주체를 모든 인간으로 명시하고 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 정부와 독일 정부의 대우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기업 제조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한국인 노동자의 80%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외국인 노동자들은 근무지를 3번 옮기면 무조건 출국해야 하고 출국하기 전에는 퇴직금도 받을 수 없다. 실업급여 등의 복지혜택도 누릴 수 없어 새로운 사업장에 입사해 첫 월급을 받기 전까지는 수입 없이 살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독일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이 내국인보다 낮아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고 노동조건에서의 차별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외국은 어떻게 성공했나

최근 헌법을 개정한 선진국들은 권력구조 대신 인간의 존엄성과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반면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 제1항은 아직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권력구조에 대한 내용에 머물러 있다. 이에 이제는 우리도 새로운 시대정신을 반영한 개정헌법을 준비할 때라는 목소리가 높다.

진정 국민의 기본권을 위한 개헌이 이뤄지려면 시민의 참여와 꾸준한 논의가 필수적이다. 1996년 개헌에 성공해 세계에서 기본권을 가장 잘 보호하는 헌법을 제정했다는 찬사를 받는 남아공은 우리에게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남아공에서는 1991년부터 마을 및 지역단위로 조직을 갖춘 아프리카 민족회의와 백인정권이 헌법 개정 협상을 시작했다. 2년간의 충분한 토론 끝에 새 헌법을 만들 새 의회를 구성하는 데 대한 합의가 이뤄졌고 그 당시 새로 취임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여기에 모든 정당, 시민단체, 사회단체의 참여를 독려했다. 의회 역시 시민의 목소리를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처럼 시민은 배제되고 정치인만 참여하는 개헌 논의는 결국 권력구조에 대한 법률적 논쟁으로 전락할 수 있다. 김영수 교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이를 무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의사결정 구조가 국민의 기본권을 최우선으로 보장하는 올바른 개정헌법을 이끄는 힘”이라며 시민들이 개헌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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