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과 오근창 박사과정

작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신해철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싸이와 함께 부른 「하늘」이라는 노래를 떠올렸다. 박노해의 시를 고쳐 쓴 이 노래의 가사 중에는 공교롭게도 “프레스에 찍힌 나의 손을 병원에 찾아갔을 때 내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내 하늘”이라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는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우리 하늘이시여, 그분의 뜻에 따라 나는 굶을 수도, 죽을 수도, 잘 수도, 살 수도, 날 수도 있어”라는 가사도 있다. 이를 들으며 작년 말 이른바 ‘땅콩 회항’으로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조현아의 갑질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우리의 암묵적인 정의감에 비추어 정당하지 않은 일방적인 관계가 성립할 때, 우리는 최근 유행한 말마따나 ‘갑질’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비난한다. 조현아가 승무원들에게 했던 행동이 공분을 일으킨 것도 항공사 사장의 가족임이 그녀가 승무원들에게 했던 모욕적 행동에 대한 좋은 이유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지’라고 우리가 말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그런 정당한 권위이고, 그것을 월권 하는 것은 갑질이 된다. 어쩌면 정치란 것도 결국 각자의 자리나 자격에 대한 규정 자체를 판단하고 문제 삼는 일이 아닐까? 그런데 많은 경우 정당한 자격을 따지는 일은 위와 같은 비판뿐 아니라 소위 무자격자를 걸러서 비난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가령 작년에 김영오 씨를 비난한 사람들도 그가 이혼한 노조원이기 때문에 ‘순수한’ 유가족의 자격에 미달한다는 구실을 내세웠던 것이다. 유사하게 세월호 유가족들을 ‘유귀족’이라는 말로 부르는 사람들도 이들이 갑도 아니면서 갑질을 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갑질을 하고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문제는 또다시 누가 진짜 갑이고 을인지를 구별하는 일이다.

얼마 전에 소설가 박민규는 조현아 사건을 ‘진격의 갑질’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그에 맞선 ‘을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제안을 따라서 민주주의 같은 개념을 갑질을 극복하고자 하는 을질이라는 운동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보면 시민들은 무수하게 많은 을들의 모임이며, 민주주의는 을질을 그 동력으로 삼는 역동적 제도에 해당한다. 갑을관계의 극복을 위한 지속적이고 집단적인 을질 또는 ‘민주화’ 과정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을 것이다. 정당한 권위를 가능한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이것이 갑질로 변모하여 차별과 배제의 이유로 쓰이지 않도록 방어하는 을질. 작사자가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하늘」 노래의 마지막 가사도 우리가 갑이 아닌 하늘, 그러니까 평등하고 자유로운 을들이 되자고, 또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상상한다.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우리 모두 서로가 푸른 하늘이 되는… 높이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이 있는 사람, 내겐 모두, 하늘 같은 사람. 결국에는 사람, 모두 다 똑같은 사람. 그 중에서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하늘 같은 사람, 희뿌연, 시커먼, 하늘 같은 사람. 나는 어디에서 나는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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