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최상희 기자 eehgnas@snu.kr

가장 가벼운 낱말들만으로 가장 무거운 시를 쓰고 싶었다. 그 반대도 상관없었다. 낱말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을 갖고 싶었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시인의 말 중에서)

시는 은밀하다. 시인만의 언어와 추상적 은유는 때때로 읽는 이에게 난해하게 다가온다. 시를 배운 적은 많아도 “나는 시가 어려워서 안 읽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만한 시를 쓰는 오은 시인의 작품은 일견 낯설면서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오은 시인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대학원을 나와 데이터 마이닝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시인이다. 그는 재수생 시절 딴짓하기를 좋아해 독서실에서 말글 덩어리들을 쓰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밖에 몰랐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라고 불릴 만한 덩어리를 뱉어냈다. 이를 남몰래 문예지에 응모한 친형 덕분에 2002년 봄,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 시인이 됐다. 그로부터 2년 뒤 김언 시인으로부터 부탁받은 시를 쓰면서 그는 불현듯 “나 이거 안 하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됐다. 처음으로 자신을 시인으로 자각한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진짜 시인으로 발돋움해 『호텔 타셀의 돼지들』『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두 권의 시집을 발표했으며 지난해에는 박인환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왕성한 작품활동만큼이나 쾌활한 모습의 오은 시인을 한남동의 작은 카페에서 마주했다.

 

▲ 인터뷰 중인 오은 시인. 그의 말놀이만큼이나 시인 자신도 장난스런 경쾌함으로 가득했다.
사진: 김희엽 기자 hyukim416@snu.kr

놀이터에서 단어를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오은 시인하면 가장 처음 떠오르는 것은 가볍고 경쾌한 ‘말놀이’다. “스리랑 카를 타고 오슬 로(path)를 따라가다 보면 암스테르 담(fence)이 나온다”(「말놀이 애드리브」)처럼 쉴 새없이 장난스러운 문장을 이어가기도 하고, “마블링처럼 웃으며/고블린보다 신나게/더블린 한복판에서/텀블링, 텀블링”(「스프링」)과 같이 운을 맞추기도 하며, “처음에 당신은 나를 시력이라고 불렀어요. 시월이 되자 나는 아침 기온이 되었고 당신의 샤프심 굵기가 되어 매일 같이 학교에 갔죠”(「0.5」)처럼 하나의 단어가 물결처럼 퍼져나가기도 한다.

「래트맨(Ratman)」에서 그의 말놀이는 극에 달한다. 쥐를 연상시키는 낱말과 어휘들이 총동원돼 시 전반에 끝없이 퍼져나간다. 화자는 “독 안에 들 때”도 있다가 “볕은 쥐구멍에만 드니 선탠을 하기도” 하고 “고양이를 만나도 겁을 먹지 않고 쥐잡듯 고양이를 잡다”가 “쥐꼬리만 한 월급을 물고” 달아난다. “세상을 쥐락펴락”하다가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오은은 “끝에 가서 실패할지라도 언어가 어디로 흘러갈지 내버려 두는 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말놀이가 어떤 효과를 노린 문학적 수사라기보다, 오은이라는 시인의 정체성에 가깝다고 전한다.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 출신도 아닌, 시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그는 “처음에 시를 쓰면서 아무 것도 몰랐던 게 좋았던 것도 있다”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아무거나 하고, 그게 연결돼 말놀이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례로 오은 시인은 초등학생 시절 국어사전을 항상 손에 쥐고 다니며 처음 보는 어휘나 순우리말에 밑줄을 치곤 했던 일을 들려줬다. 이런 버릇이 이어져 지금도 그는 말꼬리를 잇는 단어의 연상과 끊임없는 메모를 통해 말놀이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말놀이 자체가 말장난을 좋아하는 시인의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나온 셈이다. 오은 시인은 말놀이를 좋아하는 온전한 자신을 시에 녹여내며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자신의 ‘땀내’가 나는 시를 쓰고 있다.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은 일상적으로

오은 시인 특유의 말놀이는 일상을 낯설게 보는 방법에서 출발해 대상의 본질에 가닿는다. 「사우나」에서는 익숙한 사람을 익어가는 육질에 빗대는 낯선 비유가 사용되기도 하며, 「제인」에서는 낯선 서양 이름이 제인(濟靭)이나 죄인(罪人)으로 변용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오은시인은 시인의 본분이기도 한, 모든 사물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매일매일 지나다니는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그 속에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 발견된다”며 “남들이 ‘건물이 몇 층짜리야, 몇 평이야’라고 생각할 때 저는 그 건물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부터 근원까지 생각해 본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남들이 보지 못하고 보지 않는 것을 볼 때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있고, 거기서부터 비로소 시가 시작된다고 여긴다.
 

홀에는 사람이 많았다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홀에 있었다

홀이 사람에 있었다 (「홀」 중에서)

이를 통해 오은 시인은 일상 속 관계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감정들을 특유의 말놀이로 풀어낸다.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홀, 그리고 그 안에 서 있는 ‘나’의 가슴에 난 홀(구멍). 시인은 홀이라는 동음이의어를 빌려 군중 속의 고독을 노래한다. 「교양인을 이해하기 위하여」에서는 상황에 따라 머리를 갈아 끼우는 현대인이 등장한다. “오늘은 어떤 머리를 쓰면 좋을지 잠시 머리를 쓰다” 잠자리용 머리를 벗고 외출용 머리를 쓴다. 퇴근 후 실내용 머리를 쓴 ‘나’는 “수많은 머리가 휩쓸고 간 수많은 자취” 속에서 머리가 터질 지경에 이른다. 시인은 “보여지는 나를 버릴 수가 없는 것,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한 강박을 풍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경쾌한 말놀이에 오은 시인의 낯선 풍자가 더해지면서 독자는 웃음 이면의 슬픈 감정을 동시에 전달받는다. 그는 낯선 낱말의 놀이 속에 일상을 무겁고 차갑게 짓눌러오는 현실을 포개놓는다. 또 시인의 목소리는 두 극단을 지나 독자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온다. 함돈균 평론가는 오은 시인의 시에 대해 “시의 형식에서는 형이상학을, 그 내용에서는 형이하학을 포기하지 않는다”며 “그의 시가 늘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수다스러우면서도, 그것이 지시하는 사태가 실은 대개 ‘비극적’인 것도 이 때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나의 두발로 딛고 선 지금을 노래하다

일상을 요리조리 뒤집어보는 오은 시인의 시선은 일상을 넘어 현대사회의 부조리를 바라보는 것으로까지 확대된다. 가령 「식충이들」에서 현대인은 술을 먹고, 속도 좀먹고, 회사 공금도 먹고, 뇌물도 먹고, 콩밥을 먹고, 영혼도 갉아먹는 식충이 되기도 한다. 또 「엑스트라」에서는 도시문명이라는 촬영현장 속에서 고통받는 배우가 등장한다. 그의 시는 “역할 뒤에 2, 3 같은 숫자가 붙는” 엑스트라이자 “죽지 않기 위해 재채기가 나와도 참아야” 하는 현대인의 비참한 처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수정 평론가는 “그의 시는 아주 귀여운 고슴도치 같아서 귀엽고 재미있고 만져보고 싶지만, 뜨끔하다”라고 평한다. 그는 현대사회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말놀이 속에 녹여냄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질문만 있고 답이 없는 곳에 다녀왔다

서 있어도

앉아있는 사람들보다 작았다

 

가장 많이 떠들었는데도

듣는 사람들보다 귀가 아팠다

(중략)

삼십여년 뒤,

답이 안나오는 공간에서

정확히 똑같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녹지 않았다

순순히 떨어지지 않았다

(「면접」 중에서)

오은 시인은 본인이 경험한 취업의 어려움을 쓰기도 하고(「면접」「이력서」), 사촌 동생에게 들은 대학생의 슬픔을 적는 등(「졸업 시즌」) 우리, 그리고 오은 자신이 처한 사회의 현재를 다루는 시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나는 2015년 서울에 살고 있는 30대 직장인이고, 시인으로서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현장을 잊지 않는 것, 외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시 중 어떤 시가 가장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에 “가장 최근에 쓴 시”라고 대답하는 것도 지금의 자신과 사회를 민낯까지 기록하려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현재 우리가 딛고 선 사회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다름과 배려가 용납되지 않는, 몰개성화를 포착하는 데 이른다. 초등학생 시절 그는 백일장에 나가 흐린 하늘을 보고 ‘돌을 던지면 깨질 것 같은 하늘’이라고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를 불러 흐린 하늘은 창문 같지 않다고 혼냈다. 시인은 “더러운 유리창도 깨지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자신 있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경계한다. 당연한 기준으로 여겨지는 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손가락질을 하는 사회풍토 때문에 사람들의 생각이 위축되고 시야가 좁아진다는 생각. 시인의 현실인식은 이러한 통찰에까지 잇닿는다.

일상의 틈에서 자기 자신을 찾기를

이런 상황에서 오은 시인은 시간을 내서라도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대학생들에게 당부했다. 그는 “시간은 나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이라며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 꿈꿔왔던 것을 돌이켜보고 삶의 틈을 만들어 그 속에서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쪼개는 데서 온다. 「물질」에서 오은 시인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내가 누구인지 자신이 없는 ‘나’는 “접촉 없이는 너를 파악할 수 없어” 바닥에 떨어진 물감인 ‘너’를 “온몸에 덕지덕지” 바른다. 시인은 평범함을 버리고 물감을 온몸에 바르는 ‘나’처럼, 일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고 흡수해 자기 자신이 되는 기쁨을 찾으라고 한다.

그리고 이 낯선 과정의 틈 속에서 오은 시인은 자신의 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어떤 시가 사람이나 사회를 바꾼다고 할 수는 없어도, 어떤 사람의 한 순간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 시를 읽을 때의 순간만큼은 모이고 모여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을 말놀이로 보여주면서 그는 시인으로서 현재의 순간을 살아가고, 바꿔가는 시를 꾸준히 써간다.

그가 가장 닮고 싶은 시인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실상 모든 시에는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바스락거리고, 반짝거리고, 흩날리고, 흘러가는 것들이 단어에 실려 온다면, 움직이는 그림자를 가진 가상의 불변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매일 지나치는 일상의 순간을 새삼스럽게 보고, 그 안에 담긴 자기 자신, 우리 사회를 이채로운 시어를 통해 품어 안는 시인. 그의 뒷모습이 경쾌하면서 따뜻한 그의 시와 왠지 모르게 닮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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