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1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빈곤사회연대 등 225개 단체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폐지를 요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 지하철 역내에서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 이 농성은 지난 17일 1,000일을 맞았다. 장애인들은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광화문역 지하보도를 지켰다.

▲ 지난 15일(금) 시민들이 광화문역 농성장 옆에 놓여있는 11개의 영정사진을 무심하게 지나가고 있다.

1,000일째 광화문역을 지키는 장애인들

장애인들이 광화문역에 농성장을 확보하는 것부터 역경의 연속이었다. 통행에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며, 역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다며, 관광객이 보기에 미관상 좋지 않다며 한 달에도 몇 번씩 민원을 받았다. 넓은 광화문 광장을 두고 왜 지하철역 안에 농성장을 설치하느냐고 항의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구조가 복잡하고 넓은 광화문역에 휠체어 도로는 1개, 엘리베이터는 2개뿐이다. 심지어 농성을 시작할 당시 엘리베이터 1개는 고장난 상태였다. 휠체어 도로를 타고 빙빙 돌아 광화문역을 통과해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어려워 광화문 광장으로 올라가기 힘들었다. 장애인들이 광장으로 나올 수 없었던 이유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농성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대선을 앞두고 여야 대통령 후보들은 주요 공약으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폐지를 내세웠고,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국정과제로 선정하기도 했다. 두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시민단체가 나서서 농성장의 요구사항을 담은 엽서를 각 정당과 대선캠프에 보내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뜨거웠던 관심은 금세 식었다. 3년이 지난 지금 농성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뜸하다. 전국에 있는 직지장애인 자립생활센터 각 지부에서 1~2명씩 돌아가며 휑한 농성장을 겨우 지키고 있다. 서울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의 상황은 그나마 낫지만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애인들은 교통수단이 없어 매번 골머리를 앓는다. 지난 13일 농성장에서 만난 충북직지장애인 자립생활센터 이종익 소장은 전날 충북에서 올라왔다. 그는 “서울까지 오는데 버스가 훨씬 저렴하고 시간대도 많아 편하지만 시외로 이동하는 저상버스가 없어 어쩔 수 없이 KTX를 타야 한다”고 말했다. 잘 곳도 마땅치 않아 2박 3일 동안 농성장 옆에 임시로 설치한 천막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 이 소장은 “농성장이 지하철역 안에 있어 욕창이나 날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나마 다행”이라며 힘겹게 웃어 보였다.

 

문제의 핵심은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이종익 소장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농성장에 나오는 이유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다. 장애등급제는 의학적 판단 기준만으로 장애인을 1~6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각종 복지서비스를 차등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다. 문제는 복지서비스가 꼭 필요하더라도 등급에 가로막혀 신청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장애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활동보조서비스의 경우 현재 1,2급 장애인만 신청할 수 있다. 3급 판정을 받게 되면 활동보조서비스가 절실해도 신청조차 할 수 없다.(『대학신문』2014년 5월 4일자)

예컨대 뇌 병변의 경우 배변조절, 배뇨조절, 보행, 목욕하기 등을 비롯한 신체적 외상과 기능제한을 토대로 점수를 매겨 장애등급을 산정한다. 25~39점을 받으면 뇌 병변 2급이 되고, 40~54점을 받으면 뇌 병변 3급이 된다. 따라서 장애 상황이 비슷해도 고작 1점 차이로 활동보조서비스나 장애인 연금과 의료혜택 등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2013년 7월엔 간질 장애 4급을 유지했던 고 박진영 씨(37)는 장애등급 외 판정을 받아 수급권을 박탈당할 상황에 놓이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또 작년 4월엔 3급 장애인으로 분류됐던 고 송국현 씨(53)가 화재를 피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송 씨는 침대에서 한 발짝도 이동하지 못한 상태로 발견됐다. 그가 장애등급 재심사 판정과 활동보조인 요구를 한 지 5일만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장애등급제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부양의무제도 현행 장애인복지제도의 또 다른 문제로 꼽힌다. 부양의무제는 부양의무자(1촌의 직계혈족과 그 배우자)의 소득이 일정 기준을 초과하면 부양의무자에게 부양의무가 있다고 판정해 수급권을 박탈하는 제도다. 따라서 본인이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도 가족에게 근로 능력이 있다면 평생 가족에게 생활을 의존해야 한다. 설령 부양의무자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도 예외없이 수당, 연금, 의료혜택 등에서 배제된다. 정부가 부양 의무를 전적으로 가족의 책임으로 전가해 복지 사각지대를 방치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혼자서 경제활동은커녕 일상생활도 어려운 장애인에게 부양의무제는 더 가혹하다. 이종익 소장의 활동보조인 장순봉 씨는 “주위에서 장애인 자녀를 키우던 부모들을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금전적, 시간적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모가 부양을 포기하면 장애인 자녀는 당장 생계 유지가 어렵다. 호적상 부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모에게 부양의무가 지워져 장애인은 수급권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2011년엔 본인의 근로능력 때문에 장애인인 아들이 수급신청에서 번번이 탈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자살하기도 했다. 그는 유서에 ‘우리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것이 있다. 내가 죽으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동사무소 분들께 잘 좀 부탁드린다’고 적었다.

장애계의 지속적인 반발에도 정부가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고수하는 이유는 부정수급을 막기 위해서다. 복지서비스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꼼수를 써 혜택을 받아가는 것을 막아야 더 공정하게 복지의 혜택을 배분할 수 있다는 논리다.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 이영재 서기관은 “한정된 예산으로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선 검증절차를 두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장애계는 장애인복지 예산 절감을 위한 핑계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상용 활동가는 “노인, 여성, 실업자 등에게는 별도의 기준 없이 복지서비스를 신청할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면서 왜 유독 장애인에게만 장벽을 두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장애인들이 복지를 신청할 기회를 차단해 장애인복지에 쓰일 예산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정부의 진짜 속내”라고 지적했다.

 

사각지대 구제 나선 정부, 현장 반응은 글쎄?

정부도 복지사각지대를 줄이고자 나름대로 대책을 세웠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3월부터 장애종합판정체제 개편추진단을 구성했다. 현행 장애등급제를 대신할 ‘종합적 판정도구 및 모형’을 개발해 2016년부터 적용하기 위함이다. 1~6급의 장애등급은 사라지고 의료장애점수를 바탕으로 장애인 등록 여부를 결정한다. 장애인 인증을 받은 사람은 복지 욕구를 포함한 욕구 조사와 서비스 필요도 조사를 거친 후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받게 된다. 이영재 서기관은 “종합적 판정도구를 적용하게 되면 의학적 판단만을 기준으로 했던 장애등급제가 사실상 폐지되는 셈”이라며 “장애인의 삶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보건복지부는 또 오는 7월 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부양의무 기준이 현재의 최저생계비 186% 수준에서 중위소득으로 상향 조정돼 약 12만명이 추가로 수급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이상용 활동가는 정부가 추진하는 종합적 판정도구 및 모형에 대해 “현행제도에서 이름만 바꾼 속 빈 강정”이라고 비판했다. 장애등급이 없어진다 해도 등급제가 단순히 점수제로 이름을 바꾼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가에 복지 욕구가 포함된 것은 의미 있는 변화지만 서비스 필요도 조사 항목은 여전히 의학적 판단만을 기준으로 해 기존의 장애등급제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이어 장애단체는 부양의무제 자체가 폐지되지 않는 한 장애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부양의무자 때문에 정부와 가정 양쪽에서 모두 방치되는 장애인을 구제할 수 없는 현실은 그대로기 때문이다.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사무국장은 “중위소득으로 기준을 상향 조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임시방편”이라며 “예산 증액 없이 수급자 선정기준을 넓히는 것은 장애인들끼리 밥그릇 싸움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수급자는 늘어나지만 예산은 그대로인 탓에 누군가의 혜택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광화문역 농성장 앞에는 11개의 영정사진이 놓여있다. 3년 전에는 없었던 영정사진이다. 모두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가 만든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목숨을 잃은 장애인들이다. 하지만 광화문역을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은 사진에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종익 소장이 인터뷰에 참여했던 2시간 동안 서명에 참여한 사람은 고작 3명이었다. 서울용산자립센터 이선아 활동가는 “장애등급제나 부양의무제에 대해 알게 되신 분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전혀 관심 없이 지나가는 분들이 대다수”라며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