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교육과

김태웅 교수

누구나 어렸을 적에 친구 아버지의 직업을 부러워하며 나도 그 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유달리 문방구 집의 아들을 부러워했다. 국민학교 어린 시절이지만 집안 형편을 빤히 알면서 어머니한테 학교 수업에서 긴요했던 학습준비물이나 참고서 구입에 필요한 돈을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한참 동안 망설였던 나와 달리 문방구 집 아들은 거리낌없이 이런 참고서와 문구류를 가지고 등교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러움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책방집 아들에게 옮겨갔다.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사보지 못하는 처지에서 서점 안에서 이책 저책 표지를 만지며 이집 아들은 한없이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있겠구나 하는 부러움을 남몰래 간직했다. 드디어 1980년 대학에 들어와 수많은 책이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저 책은 꼭 빌려야지 하는 의지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그러나 5월 신군부 정권의 휴교령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의지는 곧 꺾이고 말았다. 시국 탓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시국이 책을 향한 나의 열기를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휴교령이 풀리자마자 책을 빌리러 도서관을 드나들었고 책 끝페이지에 붙어 있는 대출자 명단에서 존경할 만한 학자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면 우쭐하기까지 했다. 그런 분이 읽었던 책을 나도 읽고 있다는 자부심이 어깨를 으쓱거리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날의 이런 우쭐함도 요새 유행하는 각종 언론매체의 대학평가 앞에 서면 금새 사그라진다. 자신에 대한 긍지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른바 객관적 평가라는 잣대에 주눅이 들고 만다. 물론 교수당 학생수, 등록금 당 장학금 지급 비율, 학생당 책 구입비, 교수확보율, 학생 충원율, 외국인 교수비율, 국제학술지 피인용 지수, 교외연구비 등등의 다양한 지표는 대학이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매진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감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표가 대학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사회적 책무감과 고동체 의식을 일깨우고 학문과 교육의 의미를 다시금 마음 속까지 각인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남에게 비치는 외형의 성장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우리는 혹시 본받아야 할 우리의 스승과 동문 선배의 빛나는 삶에 인색함으로써 자긍심을 상실한 것은 아닌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지난 4월 중순에 어느 동문이 기록관에 찾아와 선친인 김찬도의 일지 『내 생애의 기록』을 기증했다. 비록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글이지만 나이 80을 넘어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손으로 담담하게 또박또박 적어간 회고록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수원고등농업학교 시절을 회고하면서 학생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의 앞길을 개척하고자 했던 그의 활동이다. 비록 이런 활동으로 퇴학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지만 그는 수감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포부를 당당하게 펼쳤다. 이러한 선배가 어찌 이분뿐이겠는가. 3·1운동 때 파고다 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던 동문 한위건과 함께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을 이끌었던 길영희는 시위 주동이 빌미가 되어 퇴학을 당하자 진로를 바꾸어 교육자의 길을 걸었고 광복 후 중등학교에서 스승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며 학생들에게 늘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고 설파하였다. 또한 경성의전 출신 방우용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친 뒤 머나먼 중국 옌안으로 들어가 독립운동가이자 사람을 살리는 의사로서 놀라운 인술을 펼치며 ‘우리시대의 편작’, 조선의 ‘닥터 노먼 베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물론 이러한 선배 소개가 어떤 학생에게는 과거의 특정 인물을 끄집어 내어 우리 학교의 역사를 미화하고 헛된 자긍심을 심으려는 행위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동문 선배의 이러한 용기와 활동을 부러워할 뿐더러 이들로부터 사회에 대한 책무의식을 배우고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간다면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김태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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