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동과정 비교문학전공

윤인영 박사과정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발표된 소설 『갱부(坑夫)』는 일본 메이지 시기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5)의 작품세계에서 조금 낯선 작품으로 평가된다. 주로 지식인이나 고등유민들의 고뇌를 다뤄왔던 것과 달리 이 작품에는 우연히 노동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19살 가출 소년이 등장한다. 두 소녀와의 복잡한 삼각연애에 휘말리면서 가족도 세상도 싫어진 소년은 세상의 규칙이라는 거울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면 자신이 거울 앞을 떠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5월의 어느 날 밤 소년은 도쿄의 부유한 집을 떠나 아무런 목적지 없이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걷고 또 걸으면서 소년은 생각한다. ‘그저 어두운 곳으로 가고 싶다. 어두운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소년은 회색의 흐릿한 불안을 종결시킬 수 있는 곳, 그저 어두운 곳으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소년은 불안에 이끌려 이렇게 아무리 걸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소년에게 있어 어두운 곳이란 세계도, 나의 몸도 보이지 않게 되는 곳, 즉 죽음의 장소나 다름없다.

그런데 소년은 우연한 계기로 이 어둠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길에서 소년을 발견한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묻는다. “임자, 일할 생각 없나? 어차피 일은 해야 할 거 아닌가?” 소년은 대답한다. “일해도 됩니다만.” 소년은 방황하고 있던 자신의 영혼이 누군가에게 불렸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한다. 그리고 소년은 생각한다. 적어도 일하기만 한다면, 적어도 그 들뜬 영혼이 오체 안에 방황하면서도 머물러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렇게 소년은 야바위꾼 알선업자에게 이끌려 아시오 구리 광산으로,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으로 가서 갱부가 되려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소년은 갱부가 되지 못한다. 소년은 지옥의 입구와도 같은 구불구불한 갱도를 따라 광산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다. 이러한 하강의 과정은 상징적인 죽음의 과정과도 같다. 그는 이 밑바닥에서 한 명의 전락한 인간, 그렇지만 여전히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지닌 훌륭한 인간을 만난다. 그를 통해 소년은 다시 지상으로 올라갈 힘을 얻는다. 5개월 후 소년은 광산을 떠나 도쿄로 돌아간다. 그리고 곧 스무 살이 되었을 것이다.

소세키는 이 소설을 통해서 대략 두 가지 어둠에 관해서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어둠이 죽음의 충동으로 얼룩진 공간이라면, 두 번째 어둠은 우리가 전락을 경험함으로써 마음의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게 되는 재생의 공간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재생의 공간으로서의 두 번째 어둠일 것이다. 비록 열아홉 살 소년이 아니더라도 ‘흐릿한 불안’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생에서 여러 번 그저 어두운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누군가 우리에게 ‘어차피 일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일할 생각이 없는가?’ 하고 물어올 것이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그 충동과 물음에 응하게 될까? 지금 우리의 삶에 다양한 어둠의 형식과 마음의 힘이 비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윤인영 박사과정

협동과정 비교문학전공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