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이라는 과학을 통째로 뒤엎어 놓으려는 바보’

▲ 이승엽 학술부 기자

종교의 부조리를 성토하며 종교를 뒤엎은, 나름 시대의 진보주의자였던 마르틴 루터가 표현한 코페르니쿠스다. 재미있는 것은 ‘전환’의 대명사인 코페르니쿠스 또한 태양을 도는 행성들의 궤도가 원모양이라는 개념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이 내린 완벽한 기하학 도형이 원이라는, 따지고 보면 성직자였던 루터의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였다.

행성의 궤도가 원이라는 믿음은 100년 뒤, 케플러에 의해 드디어 깨지게 된다. 케플러는 관측과 계산을 통해 행성의 궤도가 타원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런데 처음에 그도 원은 완벽한 도형이라는 전제를 버리지 못했다. 케플러는 이 완벽을 뒤엎기 위해 의문을 던졌다. “신이 완벽한 세상을 만들었다면, 왜 세상은 전쟁과 가난으로 병들고 있는 것인가?” 사실 원은 타원만큼이나 완벽한 도형이 아니며 지구는 완벽과는 먼 존재였다.

이런 추리 끝에 도출된 반전은 완벽하다 믿고 있는 것들이 실상 인간의 오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관습처럼 항상 옳다고 생각해온 이론에도 결함은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와 학문의 발전은 세계의 결함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축적한 혁명적 아이디어들을 원동력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교황에 의해 금서 목록에 오르고, 종교재판을 열어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부정했던 500여년 전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새로운 사고에 너무 인색하다.

지금 우리 사회가 ‘고민하는 것’을 쓸모없다고 치부하는 이유는 효율성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정치현실 때문일 것이다. 정부의 입장에서 『정치: 운명을 거스르는 이론』의 저자 웅거가 말하는 ‘내가 살고 있는 삶을 구성하는 틀’에 대한 고민은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고민하는 인간은 성가실 뿐이다. 의문을 제기하면 정치는 변화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는 변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말을 외면한다.

또 우리 사회는 변화를 두려워하기에 완벽이라는 테두리에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가둬왔는지도 모른다. 크게는 개헌, 작게는 선거시간 연장에 대한 정치적 논의가 전혀 진전이 없는 것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한국 정치의 어두운 면 때문일 것이다. 이념적 사유에 갇혀 실질적인 구조 개혁이나 사회 변혁은 너무나 먼 이야기가 됐고 이런 상황에서 나의 이론, 나의 사회가 완벽하다는 고정관념에 빠진 불통(不通)의 정치는 분명 진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웅거가 말하는 ‘부정능력’은 갈 곳을 잃었다고 불리는 한국 정치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이중구조를 극복하고 실질적인 사회 변화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그는 원이 완벽하다고 믿어온 우리의 고지식함을 경고하고 그 완벽함을 부정하라고 말한다.

깨지고 난 뒤 고정관념들을 돌아보면 한없이 유치하다. 그러나 그것이 깨지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사고의 과정뿐만 아니라 변화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요한다. 니체가 ‘오늘의 규칙을 폐기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 완벽한 사회가 존재하지 않음을 언제나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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