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 일대는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선 시민군의 함성과 절규가 가득 찼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2015년, 2천여 명의 시민들이 금남로에 다시 모여 5월의 광주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정부와 시민단체가 따로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5.18 기념식)을 치러 반쪽행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왜 뜨거운 감자가 됐나=5.18 기념식이 반으로 나뉘어 열리게 된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해묵은 갈등 때문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화 운동(5.18)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민중가요로, 2008년까지는 5.18 기념식에서 매년 제창됐다.

그런데 2009년 국가보훈처(보훈처)가 정부 주관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금지하면서 보훈처와 시민단체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가사 내용인 ‘임’과 ‘새날’의 의미가 북한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의심했다. 또 이 곡의 작사자인 황석영 씨가 북한을 7번이나 방문했다는 점을 두고 이 노래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양립하기 어렵고 국민통합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2009년 5.18 기념식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은 모든 사람이 함께 부르는 제창에서 합창단이 부르는 합창으로 대체됐다.

이에 여야 국회의원 162명은 2013년 6월,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공식 기념곡 지정 촉구 결의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되면 보훈처가 제창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박승춘 보훈처장은 같은 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정부가 법정기념일에 기념곡을 지정한 전례가 없고, 정부 관례상 기념일과 같은 제목의 노래를 제창해야 한다”며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 지난 17일(일) 광주 금남로 일대에 설치된 인권담벼락에 시민들이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벽화를 그리고 있다. 사진: 김민주 기자 minju1029@snu.kr

◇전남도청을 울린 임을 위한 행진곡=올해도 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거부 의사를 바꾸지 않자 5.18 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행사위)가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지만 끝내 무산됐다. 이에 행사위는 지난 11일(월) 정부 주관 5.18 기념식 불참과 보훈처 예산 거부를 선언하고 17~18일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 일대에서 독자적인 기념식을 가졌다. 시민사회계가 단독으로 5.18 기념식을 연 것은 5월 18일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5.18 기념식에 참여한 시민들은 보훈처가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어 국민갈등을 일으킨다고 비판했다. 거리공연 무대감독 박일남 씨는 “5.18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이 종북이냐”며 “왜 보훈처가 아무 문제 없던 노래에 문제를 만들고 국론을 분열시키는지 모르겠다”고 외쳤다.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자 시민들은 열광하며 따라불렀다.

이번 행사는 ‘민주를 인양하라 통일을 노래하라’는 슬로건 아래 5.18을 추모하고 민주화 정신을 잇는다는 취지로 진행됐다. 김정길 행사위 위원장은 “80년 5월 18일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했다면 이제는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모두가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만들어갈 때”라고 말했다.

올해 5.18 기념식의 각종 행사는 작년까지 마을 단위로 진행했던 것을 행사위가 통합해 주최했다. 5.18 기념식이 시작된 오후 1시부터 금남로 거리에는 시민난장이 펼쳐졌다. 시민들은 체험부스, 미술전시, 거리공연 등에 참여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5.18을 추모했다. 오월어머니집 회원들은 직접 만든 주먹밥을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부스를 마련해 눈길을 끌었다. 5.18 당시 주먹밥을 만들어 시위대를 응원하던 여성들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미술을 전공하는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인권담벼락 벽화 그리기에 나섰다. 정해진 주제 없이 학생들의 손으로 채워진 인권담벼락에는 5.18 당시 군인들의 총에 맞아 가족을 잃고 절규하는 시민들의 모습 등 5.18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거리공연도 한창이었다. 광주 토박이로 구성된 직장인 밴드 ‘헤비게이지’의 리더 장용석 씨(직장인·34)는 “광주 학생들조차 5.18을 보고 ‘5점 18이 뭐냐’고 묻는다던데 최소한 광주사람이라면 5월 18일이 무슨 날인지 제대로 알고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월호 유가족들로 구성된 4.16 연대도 이날 광주를 찾아 민주대행진에 참여했다. 민주대행진은 5.18 당시 시민들의 행진을 재현한 것이다. 4.16 연대는 5.18 유가족과 함께 오후 6시경 금남로를 따라 옛 전남도청에 도착했다. 4.16 연대의 행진을 지켜보던 광주시민 안정현 씨(68)는 “가족들의 억울한 죽음을 이유도 모른 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을 광주 시민들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며 “세월호 유가족들이 더 이상 쓰러지지 않게 광주가 힘을 나눠주고 싶다”고 말했다.

저녁 8시 즈음 기념행사의 꽃인 전야제가 시작됐다. 남구 지역주민 518명은 전야제 무대에서 오카리나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연주했다. 오카리나 공연에 참여한 한다정 씨(대학생·22)는 “지난 3월 중순 페이스북을 통해 참여 신청을 한 후 두 달 동안 공연을 꾸준히 준비했다”며 “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금지할 정도로 5.18의 위상이 떨어져 가고 있는데 더 많은 사람이 광주를 기억하고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어 광주노동자노래패연합과 615합창단이 시민들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며 5.18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5.18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금남로 일대에 제창을 거부당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며 이날 행사는 마무리됐다. 가족들의 손을 잡고 행사에 참여한 이종엽 씨(직장인·46)는 “5.18을 기억하기 위해 매년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것은 광주의 자랑스러운 문화”라며 “5.18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5.18을 기억하고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힘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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