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시절,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을 말하는 친구들의 주의, 주장은 머릿속으로 이해했더라도 나 자신의 삶은 거기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스스로 ‘한국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매기기보다는 ‘한국 엘리트’로 정체성을 매겨서였을까? 페미니즘을 말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능력없는 여성의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아주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

학부를 마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라는 곳에서 1년 남짓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여성의 문제는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여성 문제를 내세워 남성들에게 부단히 나 스스로 여성임을 각인시키는 것보다는 ‘정치’, ‘경제’ 등 무거운 담론의 대열에 동참하고, 똑같이 폭탄주를 마셔 아예 여성이라는 생각조차 못하게 하는 것이 생존논리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최근까지도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폭탄주를 몇 잔씩 마셔가면서도 별로 거부감이나 불편함을 못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첫 직장을 그만 두고 그 다음으로 내가 선택했던 집단에서도 여전히 나는 이전과 같은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나서 느꼈던 것은 대다수 남성들이 나를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것, 온순했던(?) 내가 점점 싸움닭이 되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대다수의 남성들은 여자 후배를 ‘후배’로 대하기 이전에 ‘여성’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이 문화에서는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이 생존의 논리에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돌이켜 보면, 전자나 후자나 나에게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여성성을 억압하면서 남성문화에 철저히 적응하는 것도, 혹은 여성성을 상품화하여 남성들을 이용하는 것도 올바른 방법은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에 균형있는 여성성이 설 자리 없어

몇 해 전부터 이른바 우리 사회에 ‘여풍(女風)’이라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나마 진입 과정이 공정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공직시험에 많이 도전하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냐’는 그 바람의 진원 배경 등에 대해선 언급하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제 여성들도 제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구나’라는 섣부른 기대 역시 하고 싶지 않다.

우려가 되는 것은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해 기본적 능력과 잠재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남성문화 중심으로 짜여진 벽에 부딪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학교든 다른 조직이든 남성 중심적 문화 환경에서 20%∼30% 차지하는 ‘꽃’이 되기 위해 같은 여성끼리 경쟁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꽃’이 되기 위해 남성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학교든 어디에서든 똑같이 인정받기 위해 여성이 남성보다 1.5배∼2배 더 공부를 해야 하고, 더 일을 해야 하는 현실 자체가 부당한 것이 아닌가.

굳이 ‘여성성’을 억압하지 않아도 되는, 굳이 ‘여성성’을 상품화하지 않아도 되는 그 중간 어딘가에 진정한 ‘양성평등’ 사회의 자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도 안다. 남성 중심적으로 짜여진 한국 사회에서 조금 더 편하게 생활하려면 좀더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라는 것. 씁쓸한 방식이다. 그리고 굳이 이래야만 하는 한국 사회가 싫다.

이미란
행정대학원ㆍ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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