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과 석사 안준상

검은 양장 멋스러운 내 석사논문을 보며 논문을 쓰던 지난 학기를 떠올린다. 내 논문은 결코 쉽게 쓰이지 않았다. 분수를 몰라 너무 방대하고 어려운 주제를 건드린 탓에 지난 학기 내내 하루 밤에도 수 번 넘게 자다 깨며, 어떤 밤은 내가 논문을 마무리할 수는 있을까 하는 부담감에, 어떤 밤엔 꽤나 멋진 착상을 생각해낸 설렘과 열띤 흥분에, 또 어떤 때는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뤄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괴감에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그런 밤들이 내 논문 초고에 땀과 때로 배고 스며들어, 그를 너덜너덜하게 들고 다닌 게 수개월이다. 그런 수고를 뚫고 탄생한 논문이 더 없이 자랑스럽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를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사실 논문이 마무리될 어느 시점부터 나에겐 그동안 논문을 쓰는 일에 너무나 함몰돼 놓쳐왔던, 학위 자체에 대한 어떤 근본적 회의가 들곤 했다.

 

대학 졸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이들이 태반인 오늘날. 더 나은 돈벌이를 위한 직업사관학교가 된 대학교는 어느새 대학생활을 스펙을 위해 거쳐가는 단계쯤으로 여기는 이들의 활력 없는 표정 가득한 곳이 됐다. 어디 그뿐이랴. 코난 오브라이언은 다트머스대학 졸업축사에서 대학 졸업이란 빌게이츠 같은 대학 중퇴자의 부하직원이 되는 일일 뿐이라 놀려댔다. 차라리 빌게이츠면 다행이지. 더 끔찍한 것은 성실히 공부한 대학 졸업생이 금수저 물고 태어난 못난 사장 아들 부하직원 되는 일이 이 사회의 상식이라는 점이다. 그런 부조리한 사회 구조의 현실이 이 땅에서의 대학 졸업을 한 없이 무의미한 요식행위로 만든다.

 

내가 겪었던 회의가 그런 종류다. 힘들여 석사학위를 따봤자 정작 생계를 위해서는 이 졸업장이 별 가치 없는 것 같은 현실, 졸업은 사회 속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주체로 서는 일이기보다는 어떤 의무만을 부여받는 한낱 부품이 되는 일이며, 그런 탓에 힘들게 공부해봤자 결국 남 좋은 일만 하는 것 같다는 자괴감. 구성원들에게 맹목적 생존경쟁을 강요하는 부조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졸업을 위한 나의 노력은 어떤 식으로든 정작 나를 배신하는 것만 같았다. 졸업을 위해 내가 견디어 낸 고된 시간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때때로 괜한 시간을 허비했다는 자조가 엄습해왔다.

 

그러나 그런 회의를 이겨내게 한 어떤 단초가 있었다. 박완서가 남긴 한 줄의 문장. 그는 노년의 어떤 수필에서, 나이가 들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생기는데 어찌 그 좋은 권리를 젊음과 바꾸겠느냐고 담담히 반문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힘든 삶을 견디어 낸 온 그이니 가능한 소회였다. 노대가가 그런 고된 삶을 통해 얻어낸 것은, 사회의 굴레 속에서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내야 하는 많은 의무와 강요들로부터의 자유였을 것이다. 이는 혹독한 수련을 거친 이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어낸 권리와 여유는 그 누구도 쉽게 폄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졸업’(卒業)이란 말에서 ‘업’(業)은 어떤 일거리를 의미하며, 이에는 그 일을 맡은 당사자가 짊어진 ‘의무’의 함축이 있다. 그렇기에 졸업은 말 그대로 어떤 ‘업’, 즉 ‘주어진 과제’를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한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그를 위한 학교에서의 고된 수련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온전한 ‘나의 목소리’를 내는 나름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검증과정이다. ‘졸업’이란 말은 이렇듯 원치 않게 부여받은 어떤 과업과 의무의 수행이, 실은 사회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선행돼야 하는 임무이기도 하다는 점을 함의한다.

 

물론 권리를 얻었다고 해서, 우리가 압도적인 사회구조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것처럼 말하거나, 그를 위한 사회의 검증이 정당하기만 한 것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럼에도 그 권리를 위해 수 없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섰던 피땀 어린 과정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 성실하고 고된 노력, 그리고 그에 대한 따뜻한 인정과 축하를 통해, 우리는 작은 한 걸음으로나마 우리가 온전한 자신으로 자유롭게 서기 위해 점차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런 희망과 용기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굳건히 서서 견디며 더 건전하고 나은 미래를 만들게끔 하는 궁극적인 힘이다. 대학 졸업의 의미가 사라진 이 시대에도 우리가 여전히 서로의 졸업을 진심으로 인정하며 축하해야 할 이유는 어쩌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안준상

철학과·석사졸업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