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과 백종현 교수

“대학 들어와서 처음 들은 강의가 ‘논리학’이었는데 그 강의를 듣는 순간 취직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백종현 교수는 철학 공부를 막 시작하던 시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철학과가 무엇을 배우는 곳인지도 잘 모른 채 막연히 신문 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스무 살 청년은 이후 한국철학부터 영미분석철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며 연구자의 길에 들어섰다.

백 교수가 대학에 입학한 1969년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시도가 있었고 당시 수많은 대학생들이 반대 시위에 나선 해였다. 백 교수는 “내가 8학기를 다니는 동안 한 학기를 제외하고 모두 계엄령이나 위수령, 휴교령이 내려졌다”며 “철학과 동기 20명 중 나 혼자 강의를 듣고 시험을 본 적도 많았다”고 말했다. 시위에 나가는 동기들에게 ‘너희는 나라를 지켜라, 나는 철학과를 지키겠다’고 말했다는 백 교수는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라는 대의에 공감했지만 본인의 소명은 철학이라는 믿음으로 꾸준히 공부에 정진했다.

1985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백 교수는 스승들의 권유로 시대에 맞도록 새롭게 번역한 칸트 철학의 용어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칸트 전문가이자 일제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어를 국어로 배운 세대와 달리 한국어로 공립 교육을 받은 첫 세대라는 점에서 그는 새 시대에 걸맞은 칸트 번역의 적임자였다. 2002년부터는 이른바 ‘3대 비판서’라고 불리는 『순수이성비판 1·2』『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을 비롯해 『윤리형이상학 정초』『영원한 평화』 등 칸트의 주요 저서를 번역했다. 백 교수는 번역 작업에 대해 “단순한 번역을 넘어 칸트의 철학을 한국문화에 편입시키는 작업이었다”며 “플라톤이 독일어로 번역되면 독일철학의 일부가 되듯이 칸트도 한국철학의 일부가 된 것”이라고 의의를 설명했다. 백 교수는 칸트가 한국인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 “칸트의 법철학과 윤리철학은 현대 시민사회에 필요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며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3·1 운동 과정에서 탄생한 ‘민족’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퇴임 후 계획을 묻자 백 교수는 ‘은퇴생활’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직책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냄’이라고 돼있었다”라고 운을 뗐다. 백 교수는 “연구와 논문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한가롭게 지내려고 한다”면서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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