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여름이 이렇게 확연히 구별되는 도시도 드물 것이다. 예전에 겨울에 이곳에 왔을 때, 도시는 정오까지도 침침했고 거리들을 가로지르는 네바강 지류들은 죄다 얼어있었다. 바다는 수평선까지 얼어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추위를 피해 괜히 가게에 들려서는 몸을 녹였고 인적 없는 거리엔 눈만 쌓이고 있었다.

여름을 알리며 하루에 이십 시간 가까이 내리쬐는 태양은 도시 곳곳을 녹여놓은 듯하다. 취객 몇몇만이 그 표면 위에 웅크리고 있던 네바강은 거대한 관광선과 산업 시추선, 요트들로 가득했고 물살은 발트해 끝에서부터 흘러들어 도시 곳곳을 순환하고 있었다. 건물마다 발코니 가로 여행객들이 북적댔고 옥상까지 자라난 자작나무는 열린 창문들 안으로 걸쳐있었다. 무엇보다 겨울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흑인들이 보였고, 단체로 쏟아지는 관광객들 덕분에 동양인에 대한 낯선 시선도 거의 없었다.

겨울엔 차를 타고 멀리 돌아가야 했던 여름 궁전에 수로를 따라 배를 타고 가던 도중, ‘수로’가 어떻게 도시 분위기를 바꾸고 문화의 교차로로서 기능하는지 새삼스레 떠올랐다. 1703년, 당시 아무것도 없던 황량한 늪지를 개조해 서구식 도시를 건설하려던 표트르 대제가 수로형 도시를 밀어붙인 것도, 단지 베네치아를 모방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발트해 너머의 유럽 문화가 러시아 곳곳으로 흘러드는 풍경을 상상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네바강 지류를 따라 운송업에 종사하는 노지기 알렉산드르 씨(43)는 “모스크바에선 외국인에게 자연스럽게 길을 물어볼 정도로 러시아적 생활권이란 인식이 강하지만 여기(페테르부르크)는 곳곳에 수로가 있는 것처럼 관광객들로 붐빈다”면서 수로 비유를 사용했다.

페테르부르크 도시 구조를 모스크바와 비교해 문화적 의미를 읽어낸 유리 로트만도 수로에 주목한 바 있다. 이를테면 모스크바의 길은 시내를 중심으로 방사선처럼 퍼져나가는 구조인데 반해 페테르부르크의 길은 중심점 없이 수로를 따라 연결되어 있고 네바강가에서 끊긴 길들의 시선은 발트해의 수평선을 향하고 있다. 길들의 끝 강가에 선 표트르 대제 동상의 시선이 바다 건너 유럽을 향하고 있듯이 페테르부르크는 도시 경계 너머 유럽의 존재를 근거로 자신의 의미를 획득한다.

▲ 사진1: 여름 궁전 정원 한가운데 위치한 삼손 동상

그러나 이 도시가 유럽을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새롭게 흘러든 서구 문화를 완제품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여름궁전에 도착해서 본 삼손의 동상(사진①)에서 서구성-러시아성의 미묘한 갈등 구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는 “표트르 대제가 폴타바 전투에서 승리한 날이 러시아 정교에서 ‘성 삼손의 날’이라” 사자를 찢는 삼손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설명했다. 폴타바 전투는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 벌인 북방 전쟁 중 전쟁의 승리를 담보지은 결정적 전투이며 그 결과 러시아는 발트해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즉 일견 서구 문화의 모방으로 보이는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은 기실 러시아 제국이 주체가 된 서구로의 투쟁 속에서 진척된 것이었다. 정원 한가운데 삼손 동상이 있고 그 주위로 그리스·로마 신화의 여러 신들이 배치돼있는데, 이는 서구 문화의 한가운데서 러시아 정교의 축일과 러시아 제국의 승리를 기념하는 형상이 된다.

삼손 동상 등의 러시아적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낯선 도시에 대한 회의와 서구성-러시아성의 갈등은 격화됐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특히 당시 러시아 문학가들에 의해서 활발히 드러났다. 그 작품들의 배경이 된 공간들을 현재에도 추적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푸시킨이 「청동기마상」에서 말하는 청동기마상은 표트르 대제 동상을 말하며, 해군성 첨탑이나 사자동상 등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작품의 주요 구도는 페테르부르크에 홍수가 발생해 애인의 죽음을 맞은 어떤 시민이 표트르 대제 동상을 원망하는 것이다. 홍수는 악마의 저주같은 것이었는데, 당시 시민들에게 페테르부르크가 건축방식이나 분위기 등에 있어 모두 자연을 벗어난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런 적그리스도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페테르부르크에서 홍수는 빈번했고 현재 많은 건물들이 반지하 구조로 돼있는 것도 과거 침수의 흔적이라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또한 당시 페테르부르크 문화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데, 도시 곳곳에서 그의 흔적 및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당시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서구로부터 흘러온 이성·합리주의에 감염돼 괴로워하지만 센나야 광장에서 러시아의 대지에 입맞추고 러시아 정교의 ‘바보 성자’ 모티프의 현현인 소냐에 의해 구원된다. 현재 도스토스예프키 박물관이 위치한 곳 주위로 라스꼴리니꼬프가 입맞춘 센나야 광장이 있고, 센나야 광장 샛길의 이름은 ‘구원의 거리’다.

▲ 사진2 센나야 광장 바닥에 있는 의미심장한 광고. '아가씨들, 24시간'

그런데 하필 그 센나야 광장 바닥에, 구원의 여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가씨들, 24시간’(사진②)이란 광고가 그려져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뿐만 아니라 센나야 광장 주위에 들어선 맥도날드, 스타벅스 상점은 이곳이 최초의 서구 문화 유입 속에 펼쳐진 러시아적 대지였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했다. ‘러시아성’이란 것은 이제 공허한 옛말이고 여느 국가와 같이 세계자본주의의 급류에 떠밀리고 있는 걸까?

▲ 사진3: 기념품집에서 판매되고 있는

다양한 문양의 푸틴 티셔츠

그러나 비록 파편화된 형상들이었지만 몇몇 순간들이, 현재 러시아의 문화적 지층이 역사적 굴곡만큼이나 복잡하고 특이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했다. 먼저 불과 몇 년 사이에 기념품 집에서 옛 소련 상징이 그려진 티셔츠가 많이 판매되고 그와 나란히 대통령 푸틴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들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사진③). “재작년에 왔을 땐 이런 티셔츠들을 못 본 것 같은데 최근 판매되기 시작한 것인가?”라고 묻자 기념품 집 직원 류보프 씨(25)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푸틴 티셔츠의 경우 작년에 출시돼 모스크바 등에서 많이 판매됐다”고 말했다.

작년이면 우크라이나 사태가 발발하고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서방의 제재를 받기 시작한 때를 말한다. 이 가게엔 없었지만 푸틴 티셔츠 중에는 크림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문구가 같이 새겨진 것도 있다고 한다. 이는 푸틴의 국가주의 노선에 대한 높은 지지도를 방증하는 한 사례로 볼 수 있는데, 그 지지의 기반에 반서구·반자본주의 정서가 있다는 점에서 옛 소련 기호에 대한 향수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크림자치공화국에서 산업영역에 대한 국가 개입 증대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올리가르히*들이 부정적으로 획득한 재산을 크림의 국민들에게 되돌려주려는 것”이라는 수사를 사용했는데, 여기서 반자본주의 정서는 체제 회귀가 아니라 부정 축적이나 재벌에 대한 갈등구도로 완화된다. 서구 문화와 체제에 대항해 러시아적인 것을 원하지만 소련 역사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국민의 심리를 푸틴이 파고든 것이다. 기념품 상점이라는 자본주의적 공간 안에서 소련의 이미지를 선택지로 배치해놓고 그 옆에 자신의 얼굴을 배치해놓은 풍경은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푸틴의 통합러시아당은 일부 서구주의·자유주의적 개혁 정당들과 복고 사회주의 정당 사이의 중간노선을 표방하며 지지를 얻는데, 따라서 푸틴이 말하는 국가주의에서 ‘국가’는 여기저기서의 반작용들로만 구성된 공허한 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것이 공허한 이미지일 뿐이라면 대중의 지지의 근원은 다른 데 있다. 그 근원은 이미 도스토예프스키가 조명한 바 있고 역사적 변화 속에서도 러시아 국민들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던 러시아 정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주말, 까쟌 성당 내부는 이콘에 입맞추기 위해 줄선 러시아 정교도 및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이콘’은 동방 정교에서 성서의 내용을 그린 회화 장르이며, 비잔틴 제국 멸망 이후 러시아 정교 내에서 러시아적 색채와 결합하며 계승됐다. 이콘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단순히 성서의 시각적 번역이나 예수의 이미지 재현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세계가 깃든 성스러움 그 자체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콘에 입 맞추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러시아 정교도 나탈리아 씨(49)에게 “예수의 이미지에 다가가기 위해 줄서 있는 것이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가”라고 묻자 그녀는 “이콘은 미술관에 전시된 것과 다르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예수)에게 귀속됨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콘이 이미지인가 초월적 상징인가라는 종교적 논의와는 별도로, 러시아 역사에서 지배자들이 단지 이콘의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초월적 권위를 누려왔다는 사실은 지적할 수 있다. 동방 정교의 황제교황주의 교리에 따라 러시아 제국의 챠르들은 천상의 왕국을 지상에 실현시킬 인물로 여겨졌고, 사회주의 혁명가들 역시 복원된 이콘의 후광을 업고 초이성적 권위를 누렸다. 1990년대의 혼란과 도덕적 타락에 맞서 다시 이콘 뒤의 미래 세계, 제3로마를 꿈꾸고 싶은 마음이 푸틴의 광범위한 지지와 맞닿아있고, 세속자본주의 속에서도 국익이라는 신성한 명분에 따라 사유기업 재국유화 등의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밤만 되면 술에 취해 말을 걸어와서는 ‘미국, 악. 러시아, 선.’ 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취객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믿음이 너무 습관적이고 꿈은 이미지처럼 공허해지고 정치적인 힘만 남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챠르들과 혁명가들, 세속 지배자들은 오랫동안 이콘 뒤의 세계를 분명히 제시해왔다. 그러나 사실 이콘은 그렇듯 쉽고 분명하게 형상을 내어주지 않는다. 하루는 페테르부르크 외곽의 조용한 소도시 프스코프의 작은 성당 안에 갔었다. 매우 좁은 창문으로 몇 가닥의 밝은 빛들이 들어와서는 망설이는 눈동자처럼 침침한 갈색 바탕의 성모 위를 헤매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그러나 도시의 낮은 마무리될 줄을 모르고 피로하게 쏟아졌다.

 

*올리가르히 : 고대 그리스에 존재한 소수자에 의한 정치 지배(과두정치)를 뜻하는 러시아어. 러시아 신흥재벌을 뜻한다.

 

사진① 여름 궁전 정원 한가운데 위치한 삼손 동상.

사진② 센나야 광장 바닥에 있는 의미심장한 광고. ‘아가씨들, 24시간’

사진③ 기념품집에서 판매되고 있는 다양한 문양의 푸틴 티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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