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대 미술관 ‘흔적에서 작품으로: 서울대 미술관 소장품 기획전’

흔적, 물감이 캔버스 표면에 닿는 순간에 만들어지는 자국. 우리가 흔히 그림 속의 흔적에 주목할 때는 그것이 결정적인 한 획일 때 뿐이었다.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려 사실적인 느낌을 추구했던 19세기 전반의 회화에서 붓자국 하나하나의 존재는 희미했으며 또 희미해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날 흔적은 예술작품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요소로만 그치지 않는다.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축적된 작가의 물리적인 흔적은 이전보다 큰 존재감을 드러냈다. 붓자국과 먹선 같은 사소한 흔적만을 모은 것도 현대미술에서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물감 외에 플라스틱, 인조 보석 등의 재료가 남긴 자국도 흔적이라는 창작의 기본단위로서의 역할을 하게 됐다. 이렇게 과거와는 다른 흔적의 위상을 보여주는 ‘흔적에서 작품으로’ 전이 다음달 20일(일)까지 서울대 미술관에서 열린다.

물감을 주제로 한 첫 번째 섹션에서는 붓질뿐 아니라 번짐, 튀김 등 캔버스와 물감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나타낸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 송수남 작가의 ‘여름나무’는 짙거나 옅게 그린 세로의 먹선만으로 흰 화선지를 오롯이 채운 수묵화다. 감상자는 짙은 선을 보면서 서로 가까이 모여 있는 나무들의 형상을, 사이사이 보이는 옅은 선과 여백을 보면서 숲 사이로 들어오는 빛줄기의 형상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먹에 섞여 들어간 물이 만들어낸 습한 느낌 때문에 그림의 배경은 다른 어떤 계절도 아닌 ‘여름’처럼 보인다.

▲ 사진 2: 윤명로, '균열', 캔버스에 혼합재료, 129.8×96.7cm, 1976

붓으로 찍어 바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감 본연의 물성을 살려 흔적을 재현한 작품도 눈에 띈다. 윤명로 작가의 ‘균열’은 물감이 굳으면서 갈라지는 ‘크랙’(crack)기법을 사용한 작품이다. 우연에 기댄 그 치밀한 갈라짐은 나무의 표면이나 마른 땅을 연상시킨다. 갈색 화면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많은 틈은 하나의 패턴을 형성하며 감상자에게 물리적인 균열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홍수연 작가의 ‘White Rush #1’는 액체로 된 물감이 흐른 뒤 마른 흔적을 겹겹이 덧댄 작품이다. 홍 작가는 “흐르는 물감이 자리를 완전히 잡을 때까지는 캔버스를 기울인 채로 움직일 수 없다”며 “이는 작품과 나 둘만의 싸움처럼 느껴지는 과정”이라고 작업에 대해 밝혔다. 서서히 움직이는 듯한 하얀 형상으로 남은 물감의 흐름은 작가가 캔버스와의 ‘싸움’으로 만든 오묘한 효과를 실감하게 한다.

▲ 사진3: 홍수연, 'White Rush #1', 캔버스에 혼합채색, 165×165cm, 2006

‘물질’의 흔적을 다룬 두 번째 섹션은 평면에서 입체로, 물감에서 비누와 플라스틱 블록으로 현대화된 작품을 선보여 기존의 흔적에 대한 개념을 확장시킨다. 특히 일상적 사물의 변주가 남긴 흔적이 감상자의 눈길을 끈다. 고산금 작가의 ‘조선일보’는 신문 한 면에 있는 모든 활자를 진주알로 대체한 모습의 작품이다. 사라진 활자의 흔적과 활자 대신 반짝이고 있는 진주는 도움이 되는 정보라는 의미의 표현인 ‘pearls of wisdom’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활자를 변주함으로써 작가는 감상자에게 신문지를 예술로서 감상하게 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신미경 작가의‘Translation_vase(항아리)’는 비관습적인 재료의 사용으로 흔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은 도자기의 외형을 그대로 본떴지만 수천 년을 견디며 반영구적으로 보존되는 대리석 대신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비누를 재료로 사용했다. 비누는 대리석처럼 매끄럽지만 사람의 손이 닿으면 흔적이 남고 그만큼 소모돼 언젠가 사라진다. ‘번역’이라는 작품명은 고전적인 도자기가 반대되는 성격의 재료인 비누로 새롭게 태어나고, 그 탄생의 과정에서 생겨난 흔적이 작품 표면에 남는 작업과정과 관련된다.

▲ 사진1: 고산금, '조선일보(2010년 11월 24일 섹션 A6, A8)', 4mm 인공진주, 접착제, 아크릴물감, 나무패널, 60×87cm, 2011

정신영 학예연구사는 “화가가 캔버스에 긋는 한 획이나 조각가가 입체를 만들기 위해 구부리는 철사의 한 마디는 완성된 작품에 접근하기 위한 창작의 기본단위”라며 “작품의 기본단위에 집중하면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이해하면 친근하게 예술을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시의 기획의도를 밝혔다.

모든 예술작품은 흔적으로부터 출발한다. 창작의 기본요소인 작품의 창작과정, 작가의 작품세계 그리고 재료가 남긴 흔적은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어 시각적 긴장감을 유지한다. 흔적이 모여 작품이 됐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산재한 무언가로 볼 수도 있고, 하나의 이미지로 볼 수도 있다. 작품을 비로소 예술로 만드는 것은 하나하나의 흔적들일까, 아니면 그것이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일까? ‘흔적에서 작품으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사진 제공: 서울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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