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제1회 고시촌 영화제

끈적이는 여름밤, 지하 골방에 서식하는 외롭고 우울한 총각 성재에게 불현듯 나타난 죽부인. 왠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매력을 내뿜는 죽부인에 성재는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황당해 보이는 이 이야기는 단편영화 「죽부인의 뜨거운 밤」(이승주 감독)의 시놉시스다. 암갈색 대나무로 짠 죽부인에서 여성의 하얀 손이 스멀스멀 뻗어 나오는 장면으로 공포와 황당함을 동시에 일으키는 이 영화는 ‘똘끼 충만하다’는 극찬을 받았다. 이 영화에 대상을 수여한 ‘제1회 고시촌 영화제’는 8월 22일(토), 23일 이틀 동안 대담한 상상력으로 똘똘 뭉친 단편영화 46편을 선보였다.

▲ 고시촌 단편 영화제 포스터

‘시험’이라는 주제로 치러진 이번 영화제는 고시촌 곳곳의 카페나 분식집 등 ‘생활밀착형 영화관’ 9곳에서 나누어 치러졌다. 편안한 차림의 진행요원이 영사기 한 대와 작은 스크린을 설치하자 고시촌의 작은 식당은 어느덧 무료 영화관이 됐다.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식당 의자를 끌어다 스크린 앞에 자리를 잡고 영화에 빠져들었고, 영화를 볼 생각이 없는 손님들은 스크린을 등지고 앉아 수다를 떨었다. 스크린 앞으로 사람이 지나가 그림자가 지거나, 장비 오류로 영화가 중간에 끊겨도 누군가 짜증내는 일이 없었다.

고시촌 영화제는 사회적 기업 ‘사람과 이야기’와 관악구청이 국가고시의 축소로 정체성의 위기에 빠진 고시촌을 살리기 위한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막을 올리게 됐다. 독립영화 감독이기도 한 허경진 집행위원장은 “고시촌은 종잇장과 볼펜 몇 자루 가지고 인생역전을 꿈꾸던 젊은이들이 살던 동네”라며 “젊은이들의 열정이 가득한 곳이라는 마을의 의미를 살려 예술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영화제를 기획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홍대와 대학로의 집값이 오른 최근 가난한 예술가들이 집값이 싼 신림동에 관심을 가진 덕분에 이들의 기획은 더욱 힘을 얻었다. 올해 3월에서야 예산이 잡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공모전을 열어야 했지만 출품작 수는 기대 이상이었다. 허 집행위원장은 “소규모 단편 영화제에 50편 정도 들어와도 성공인데 103편이 들어왔다”며 “그만큼 이곳에서 자기를 표현하려는 목마름이 많은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국내 최초 대놓고 하는 B급 영화제’라는 당찬 부제가 붙은 이번 영화제는 A급 주류 영화가 멀티플렉스 극장을 차지하고, 단편영화는 장편영화를 위한 디딤돌로 치부되는 한국 영화계의 현실에서 소외된 B급 단편영화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됐다. 독립영화 감독이나 대학교 동아리 아마추어 감독 등 관객을 만나기 어려운 영화꾼들의 작은 이야기가 당당히 스크린에 내걸렸다. 진지한 것에서부터 코믹한 것, 부드러운 영상미를 지닌 것에서부터 B급의 컬러풀한 영화까지 이들의 영화는 다양한 인물군만큼이나 가지각색이었다.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의 김수림 감독(정치외교학부·10)은 “1년에 한 번 자체적으로 여는 영화제 외에는 찍어둔 영화를 보여줄 기회가 없었는데 현수막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작품을 출품했다”고 영화제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여러 작품들이 재수생, 취업준비생, 이등병, 고시생 등 사회에서 B급 취급을 받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B급 영화제’라는 구호는 더욱 살아났다. 「서울대입구」(진청하 감독)에서 삼수생 대원은 서울대 구경을 갔다가 서울대를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혜영을 마주친다. 얼떨결에 자신도 서울대생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만 대원은 들키기 않기 위해 강의실까지 들어갔다가 도둑으로 몰린다. 실랑이 끝에 가방이 떨어져 EBS 교재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N수생 잔혹 스토리의 절정부다. 「서로의 입장」(김의곤 감독)에서는 입대 후 첫 휴가를 나온 이등병 동인이 ‘잘 되고 있는 사이인 것 같은’ 장미를 만나러 간다. 내일 뭐 하느냐는 동인의 쑥스러운 물음이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로 퇴짜 당하는 순간, 가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 영화마저도 주인공을 놀리며 웃음을 자아낸다.

▲ 카페 카페인에서 관객들이 「킬링 미 소프틀 리」를 감상하고 있다. 뺑소니 사고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진 동생의 산소 호흡기를 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두 여배우의 열연이 관객들을 숨죽이게 했다.

사진: 김명주 기자 diane1114@snu.kr

많은 감독들이 영화제의 주제인 ‘시험’을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갈등이나 위기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여 영화제에 공감을 더했다. 「예리한 선택」(강예진 감독)의 소녀는 ‘앞머리를 자를까 말까’하는 문제를 하나의 숙명처럼 온종일 고민하고, 「빌리오네어」(오세인 감독)의 주인공은 영어 과제를 하려고 PC방에 갔다가 200원이 부족해 위기에 빠진다. 무성영화 「초대 받지 못한 손님」(조수연 감독)은 추운 겨울 고급 카페에 바퀴벌레가 몰려들자 알바생 주인공이 벌레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번 제1회 고시촌 영화제는 예술 관련 활동가와 동네 구성원 등 많은 이들의 협력으로 더욱 빛이 나는 축제였다. 신림동에서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를 펼치는 청년 예술 단체 ‘다리 밑 프로젝트’의 팀원들이 진행요원으로 나섰고, 영화관으로 지정된 식당 주인들도 흔쾌히 자리를 내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평소 독립영화를 좋아한다는 카페 ‘카페인’ 사장 정성욱 씨(35)는 “저예산인데다 알려지지 않은 독립영화를 알리자는 좋은 취지라고 들어서 영화제에 협조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나둘씩 떠나가는 사람들, 빈 방이 넘쳐나는 고시원, 사법존치를 주장하며 거리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현수막까지 신림동 고시촌은 지금 뒤숭숭하다. 물론 한 번의 영화제가 황량해진 고시촌을 단번에 예술촌으로 탈바꿈시키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B급 인생 이야기가 가득한 이번 영화제는 마을에 유쾌한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고시촌이 기존의 공간만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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