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 때마다 필자는 이 말을 들어야 했다. 초등학교 졸업은 곧 중학교 입학을, 중학교 졸업은 곧 고등학교 입학을, 고등학교 졸업은 대학교 혹은 재수학원 입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사춘기 시절의 반항심으로 ‘그럼 왜 졸업을 하는건데’라는 반문을 품기도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졸업의 의미는 생각보다 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때엔 아파트 단지들을 연결하는 육교를 사이에 두고 학생들이 두 개의 중학교로 나뉘어 배정됐다. 나는 나와 같은 중학교에 입학한 친구들과 더 돈독해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매일 10시까지 학교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중학교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모교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지만 졸업한 후 내 세계에는 상당히 큰 변화가 생겼다.

졸업식은 졸업하는 사람을 배웅하는, 시간이 흘러 매학기 돌아오는, 익숙한 행사일 수 있다. 하지만 졸업하는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정년을 맞아 연구실을 비우는 교수님 한 분 한 분께 졸업은 큰 의미를 지닌다. 졸업은 시간이라는 직선상의 한 점을 의미하는 단순사건이 아니다. 졸업은 오히려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웜홀을 건너가는 것과 같다. 한 시공간을 완전히 변화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세계가 완전히 뒤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졸업식 때는 왠지 모를 슬픔과 홀가분함, 아쉬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학교를 떠나는 사람에게는 그의 삶이 180도 바뀔 것이다. 『대학신문』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30년간 환경보호를 외쳤던 교수, 칸트 철학을 한국어로 번역한 교수, 2년간 아랍에미리트에서 어린이 심장병 환자를 돌본 교수 등 자신의 분야에서 노력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기사 마디마다 교수들의 열정과 신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이날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느낄 수 있었다. 반면 학생들의 삶에 관해서는 무엇이 언급됐는가. 단지 연구자의 길을 걷겠다는 학생의 이야기가 그 많은 학생들의 세계들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졸업하는 학생들의 이름 석 자를 나열한 것으로 그들의 세계가 표현되는가.

『대학신문』은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언론이다. 그런데 졸업호에 과연 학생들의 졸업 이야기가 잘 드러났는지 의문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이 있다면 취업에 몰두하는 학생이 있을 것이고, 창업을 준비하는 학생도 있고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졸업을 맞아 자신의 지난 대학생활을 뒤돌아보며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학생들의 졸업을 두고 사회문제들을 다각적으로 보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신문』은 2,371개의 세계 중에서 한 두 개의 이야기만 소개하였고 오히려 그들을 떠나보내는 재학생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여러 교수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들이 교정에서 불태웠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학생들의 풋풋한 대학생활은 느낄 수 없었다. 사설 역시 졸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졸업호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졸업하는 학생들의 이야기, 그들의 대학생활과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빽빽하게 실려야 하지 않을까. 2,371개의 이름들로 2,371개의 세계를 담아낼 수는 없다.

 

김지원
역사교육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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