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작은 목소리가 담긴 잡지들 - ① 노동자 잡지 「작은책」

▲ '가난한 사람도 보라'는 뜻에서 「작은책」창간호 가격은 1000원이었다. '노동자 글쓰기 어떻게 할까'라는 꼭지 제목이 인상적이다.

20년 동안 하나의 지향을 꾸준히 지켜온 잡지가 있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 1995년 어느 아동문학가의 슬로건에서 출발해 고스란히 「작은책」의 창간 정신이 됐던 이 말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들을 수 없는 목소리다. 일하는 사람의 애환은 CEO의 화려한 부상에 가려지기 십상이고 글이라는 것은 이미지와 영상이 주류가 된 시대에 점점 읽히지 않는다.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은 지금 삶이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태도로 사회의 작고 낮은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잡지 「작은책」이 있다. 지난 5월 1일 창간 20주년을 맞은 이 잡지가 줄곧 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

 

노동자 글쓰기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 글에는 지식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절절함이 있다.” 화려한 수사도 전문적인 지식도 없는 어느 노동자의 글을 읽고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했다. 「작은책」의 창간 멤버 중 한 명이자 현재 편집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철학자 윤구병 씨는 1993년 당시 노동조합회보(노보)에 실리는 글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노동자들이 직접 쓴 ‘살아있는’ 글이 몇몇 사람에게만 읽히기엔 아깝다고 생각했다. 윤구병 씨는 전국에 영업을 다니던 출판사 영업부장에게 각지의 노보들을 모아오게 했고 그렇게 쌓인 노보에서 글을 추려 ‘노동자 글모음’이라는 제목으로 월간 「길」에 실었다. 독자들의 호응이 있었던 ‘노동자 글모음’에서 그는 다시 일부를 추려 「작은책·노동자 글모음」이라는 비정기 간행물을 연이어 냈고, 이를 「작은책」이라는 월간지로 만들 것을 결심했다. 1995년 3월에 창간준비호가, 곧이어 5월 1일 노동절에 월간 「작은책」이 세상에나왔다.

「작은책」의 창간 정신은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아동문학가 고 이오덕 씨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작은책」이 창간된 90년대는 글이 이른바 지식인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대학교육을 못 받고 국어문법에 어두운 노동자들이 글을 쓴다는 것을 사람들은 매우 낯설게 여겼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노동조합 조직율은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노동현장에서 스스로의 삶을 기록하고 알려야 할 필요를 노동자들은 그 누구보다 느끼고 있었다. 윤구병, 이오덕을 비롯한 몇몇 교육자와 운동가는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이라고 믿었다. 이오덕 씨는 “일하는 사람들이 문인들의 글을 흉내내지 않고 직접 겪고 들은 이야기를 써야한다”며 글쓰기를 통해 그들의 삶이 더 풍부해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창간정신에 동조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합류해 「작은책」을 꾸려나갔다. 오래 전부터 노동운동에 뜻을 품어온 초대 편집장 차광주 씨와 2대 편집장 강순옥 씨도 그 중 하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책」이 독자층을 확보하지 못해서 얼마 안 가 망할 거라고 걱정했다. 「작은책」 안건모 대표는 “노동자들에게 좋은 읽을거리를 제공해준다면 호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계속 책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윤구병 씨와 차광주 씨, 보리출판사 영업부장 정낙묵 씨는 가방에 잔뜩 넣어 다니면서 전국에 「작은책」을 알렸다. 그렇게 조금씩 늘어난 초기의 독자들, 가난한 처지에도 책을 구독해준 노동자들이 「작은책」의 성장에 큰 힘이 됐다.

▲ "비정규직 남편을 둔 여자가 있어요. 출근 나갈 때 남편 보고 작업복 바지가 해지니까 돈을 줘서 바지를 사라고 했어요. 근데 나중에 전화가 와. 살 수가 없대요. 비정규직이라서, 정규직한테만 판대. 그런데 결국 샀어, 정규직한테 부탁해서. 나중에 여자가 바지를 다리면서 우는 거야. 그걸 썼어. 비정규직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소용없는 거야. 이 글 한 편만 봐도 비정규직이 있어서는 안 되는거구나 하고 알잖아. 이게 공감인 거예요."

-「작은책」안건모 대표

 

일하는 사람들의 진짜배기 글을 담다

“「작은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안건모 대표는 20년 간 서울에서 버스운전기사를 하다 「작은책」을 보고 글을 쓰기 시작해 이후 10년 넘게 「작은책」의 살림을 꾸려온 범상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현실을 고발하는 약자들의 글쓰기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를 바꾼다고 말한다. 그래서 「작은책」에 담고자 하는 글의 첫 번째 조건도 ‘공감할 수 있는 글’이다. 안 대표는 “현대중공업 노동자가 쓴 글을 보고 그를 잘 몰랐던 사람도 그 사람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 공감”이라고 설명했다.

「작은책」에 실리는 글은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쓴 생활글이다. 「작은책」 독자의 대부분은 평범한 주부, 노동자, 농민이며 이들이 곧 「작은책」에 글을 쓰는 필자다. 글쓰기의 욕구를 느낀 독자들이 만든 글쓰기모임은 창간 직후 생겨나 지금까지 잡지의 긴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작은책」의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코너에 실리는 글은 바로 이 글쓰기모임으로부터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다. 반드시 노동운동의 현실과 관련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노동자들이 말 그대로 생활 속에서 겪고 들은 이야기라면 실리기에 충분하다. 예컨대 학부모 간담회에 온아빠들과 술을 마신 교사의 이야기나 입양한 막내딸에게 입양 사실을 털어놓은 이야기, 클럽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을 만난 군인 이야기 같은 소소하지만 진솔한 글을 찾아볼 수 있다.

「작은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코너인 ‘살아온 이야기’는 말 그대로 한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어온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보통 수회에 걸쳐 연재된다. 전문적인 글쓰기 경험이 없는 필자가 매회 자기 인생의 중요한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듯 묘사하는 것이 마치 연재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살아온 이야기’의 필자는 소위 많이 배운 사람도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다. 안 대표는 “처음에는 절대 못 쓴다며 한사코 거절하는데 서너 번 연재를 하다보면 본인이 신이 나서 점점 글이 길어진다”고 말했다.

▲ 『대학신문』이 방문한 날 마침「작은책」9월호가 인쇄소로부터 도착했다. 편집자 김이진 씨가 독자에게 발송할 잡지를 포장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잡지답게 「작은책」은 현장노동자와 끈끈하게 연대해왔다. 지면에는 편집자가 사업장을 방문해서 쓰는 탐방 기사 외에도 노동자가 일터에서 일어난 일의 사연을 자기 손으로 써서 보내온 ‘일터에서 온 소식’ 꼭지가 있다. 안 대표는 “우리가 취재를 해서 쓰면 어느사업장이든 다 비슷비슷해진다”며 “그런데 ‘일터에서 온 소식’은 본인이 직접 쓰니까 하나하나가 다른 절절한 사연들이라 마음을 울린다”고 설명했다. 꼭 지면에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작은책」은 꾸준히 노동자들이 부당한 현실과 싸우고 있는 현장에 함께 해왔다. 전국의농성 사업장이나 집회 현장을 찾아가는 투어활동이나 구속·해고노동자들에게 후원금을 보내는 활동은 수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어른 손바닥만한 「작은책」이 작지 않은 이유는

20년 동안 창간정신을 지키며 한 길을 걸어왔지만 최근 「작은책」이 처한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독자의 대부분이 평범한 노동자다보니 「작은책」의 경영 사정도 그들의 현실과 함께 오르락내리락했다. 안 대표에 따르면 몇 년 사이 열심히 투쟁해도 이기는 사업장이 거의 없어졌고 해고된 뒤 복직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직장에서 해고돼 책을 볼 수가 없다”며 구독을 끊는 독자가 줄을 이었고 결국 20주년 기념호에 안 대표는 후원을 요청하는 쪽지를 띄워야만 했다.

어려운 사정에도 「작은책」이 택한 방향은 자신의 오래된 신념을 지키며 독자의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살림을 꾸려가기에도 빠듯한 「작은책」 편집부에는 대표를 포함해 네 명의 직원이 박봉을 감수하며 분투하고 있다. 「작은책」은 초창기부터 상업광고를 받지 않고 있다. 노동자의 삶을 담아내고 노동운동을 지지하는 잡지가 기업의 광고를 받을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대신 진보, 생태 지향의 출판사 책 광고나 시민사회단체의 공익광고를 받고 광고비를 댈 수 없는 영세한 잡지나 출판사와 광고를 맞교환한다. 지난 5월부터 독자들로부터 도착한 후원금은 「작은책」을 넉넉히 인쇄해 어려운 노동자와 이웃들에게 보내주는 데 쓰이고 있다.

「작은책」은 시쳇말로 ‘장사’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잡지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정체성을 지켜나가며 「작은책」의 가치를 알아보는 독자를 더디지만 정직하게 늘려간 것이 그들 나름의 ‘마케팅’ 전략이다. 안 대표는 “그래도 망하지는 않을 것 같다”며 “사회가 퇴보하는 듯 느리게 변하다 갑자기 뒤집어진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였다”고 말했다.

경제적으로는 항상 어려운 「작은책」이지만 20주년 기념호는 독자들의 애정과 신뢰가 듬뿍 담긴 축하글로 빼곡하다. “「작은책」을 만나기 전 나는 일만 하는 노동자였습니다. 「작은책」을 만난 후 나는 일도 하고, 글도 쓰는 노동자가 되었습니다.”(「작은책」 2015년 5월호, 율촌화학 노동자 윤희웅 씨의 글) 20년 전 노동자들이 책을 읽겠냐고, 얼마 안 가서 망할 것이라고 했던 잡지는 여전히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가 정말 세상을 바꿨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기는 쉬워도 마음을 얻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지금,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작은책」의 오래된 꿈은 작지 않고 이를 지지하는 5천 독자의 존재도 작지 않다. 세상에 처음 나올 때부터 줄곧 어른 손바닥만했던 이 「작은책」이 실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사진: 장유진 기자 jinyoojang03@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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