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후 독일의 양심 귄터 그라스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는 자만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삽화: 최상희 기자 eehgnas@snu.kr

영화 「암살」이 광복절 당일 천만 관객을 넘었다. 1933년 경성을 무대로 친일파 암살작전에 나선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흥행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영화는 이른바 ‘김원봉 논란’에 휩싸였다. 극 중 김구와 함께 암살작전을 계획하는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한 독립운동가. 하지만 그는 해방 후 김구, 김규식과 함께 한 남북협상이 실패하자 월북했다. 이후 북한정권 수립에 힘을 보탠 김원봉은 김일성과의 정치 투쟁에서 패해 숙청당했다.

그의 과거 행적과 함께 김원봉의 여동생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한 사실과 ‘2015 교육과정’에 따라 만들어질 국정 한국사 교과서에서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이유로 그의 이야기가 빠진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이 논란은 더 크게 번지고 있다. 반대로 보수 진영에서는 김원봉을 6.25 전쟁 당시 같은 민족에 총구를 겨눈 전범이라고 비판하며 그가 영화로 인해 미화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같은 오랜 물음이 다시금 재현된 셈이다.

누구의 역사가 옳고 무엇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인가. 독일의 작가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는 이에 대한 답을 평생 고민했던 작가였다. 20세기 마지막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전후 독일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대작가 귄터 그라스. 『대학신문』에서는 지난 4월 13일 세상을 떠난 그의 삶과 작품세계 속에 나타난 역사에 대한 성찰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죄의식에서 시작된 기억에 대한 탐구

▲ 삽화: 이철행 기자 will502@snu.kr

귄터 그라스의 유년 시절은 그가 1927년 태어난 단치히(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시작된다. 카프카에게 프라하가 그랬듯 그라스에게 단치히는 그의 문학적 고향이었다.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지역,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단치히에서 그라스는 가난한 식료품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담뱃갑에 그려진 르네상스 시대 그림을 모으며 예술가의 꿈을 품은 평범하면서도 특이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1933년,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가는 이 자그마한 항구 도시에 나치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1933년에 제3제국을 선포한 히틀러는 그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당시 중립도시였던 단치히 의회마저 나치에 의해 장악되자 그라스는 나치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불완전한 의식의 아이’가 됐다. 단치히의 독일인들은 강력한 독일을 외치는 나치의 십자가에 열광했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두려워했다. 소년은 주위 친구들처럼 나치 소년단에 가입하고, 제복을 입었으며, 우월한 게르만족의 역사를 배웠다. 전체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그라스는 불완전한 자아를 조국을 위협하는 적들과 싸워 채우려고 했다. 청년 그라스는 독일 잠수함 부대에 지원했다 떨어진 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나치 무장친위대(Waffen-SS)에 입대하게 된다.

조국을 위해 참전했던 그라스는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야 아우슈비츠의 진실과 가면 속 숨겨진 나치의 모습을 발견했다. 미군 포로 시절 유대인 수용소의 흑백사진들을 보여주는 교육장교에게 “독일인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그라스는 시간이 흘러 자신도 범죄에 가담했던 공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서전 『양파껍질을 벗기며』에서 당시를 떠올리며 “배고픔이 그랬던 것처럼, 죄과와 그에 따르는 부끄러움 역시 우리를 갉아먹고, 끊임없이 갉아먹었다”고 읊조리듯 고백한다. 이후 그라스는 자신 또한 아우슈비츠의 가해자라는 죄의식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종전 후 그라스는 너무나 쉽게 나치의 기억을 잊은 전후 독일 사회를 목격하고 분노한다. 나치 청산은 뒷전이 돼버린 지 오래, 서독의 아데나워 정권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할슈타인 원칙*과 재무장정책에 집착하며 우경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전체주의의 싹과 과거를 까맣게 잊은 독일 시민들의 모습은 그라스를 또다시 죄인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뜨렸다. 전후에 뒤셀도르프대학에서 조각을 배워 묘비를 제작하는 석공으로 가난하게 하루하루 연명하던 귄터 그라스는 자신의 예술가적 재능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분노를 담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전후 독일 작가 모임 ‘47그룹’(Gruppe 47)의 지지 아래 소설가로 거듭났고, 죄의 기억을 불러와 첫 소설인 『양철북』을 집필한다.

 

*할슈타인 원칙: 1955년 표명된 서독의 외교정책으로, 구소련을 제외하고 동독정부를 승인하는 어떤 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양철북』속 나치 시대의 기억

1959년 발표돼 귄터 그라스를 단숨에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만들어준 『양철북』은 나치 독일에 대한 알레고리 소설이다. 알레고리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으로, 상징이 단순히 대상과 개념에 대한 비유라면 알레고리는 우리가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이질적인 상징들의 혼합이다. 20년 간『양철북』 연구를 종합한 독일 쾰른대학의 노이하우스 교수는 “『양철북』은 원칙적으로 해석을 거부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만큼 그라스의 작품은 읽기 어렵고 복잡하며, 여러 알레고리 속에 작가의 이야기를 숨겨 놨다.

역사소설의 관점에서 『양철북』의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와 그의 북은 독일 소시민들에 대한 비판의식의 알레고리라고 볼 수 있다. 성인의 정신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오스카는 1927년 자신의 세 번째 생일날, 나치에 저항하지 않는 소시민들을 보고 좌절해 스스로 성장을 멈추고 양철북을 두드리는 삶을 선택한다. 난쟁이로 남은 오스카의 몸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나치에 순종한 그라스와 단치히의 시민들을 뜻한다. 평범한 식료품상에서 열렬한 나치당원이 되는 오스카의 아버지 알프레드 마체라트, 남편이 보는 앞에서도 사촌 얀과 바람을 피는 어머니 아그네스, 썩은 개구리 끓인 물을 억지로 먹이며 오스카를 괴롭히는 친구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목격한 ‘악의 평범성’은 오스카가 성장을 그만둔 이유가 됐다. 그리고 오스카는 이들 앞에서 수없이 양철북을 두드렸다. 조현천 강사(한국해양대 유럽학과)는 “성인의 정신능력과 세살박이의 외모는 그에게 독특한 서술시점을 허용한다”면서 “오스카는 밑에서 올려다 보는 독특한 시각을 통해 소시민 사회를 비판하는 데 유리한 지점에 서게 된다”고 해석했다.

히틀러가 죽은 후에도 오스카는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데 실패한다. 패전 후 비로소 나치의 멍에를 극복하기로 한 독일인처럼, 오스카는 “나에게는 이제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는 없고 다만 ‘자라야 한다, 자랄 것이다’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나는 북을 몸에서 끌러 북채와 함께 마체라트의 무덤 안에다 던져버리고는 성장할 것을 결심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스카의 성장은 94cm의 난쟁이에서 122cm의 곱추로 변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는 과거를 청산하지 않은 독일 사회이자 죄의식의 혹을 갖게 된 작가 자신을 의미한다. 그라스는 여전히 나치를 극복하지 못한 독일인들이 더 흉측한 괴물로 변해버리고 있다는 것을 소설 속 오스카의 굽은 등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귄터 그라스는 복잡한 알레고리 속에 자신의 기억을 담아 독일인에게 독일의 역사를 기억할 것을 역설한다. 박환덕 명예교수(독어독문학과)는 “그의 작품에는 동족의 민족문화와 생활양식을 구제해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보편적인 것으로 보존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고 분석한다. 마치 오스카의 몸부림이 단치히 전체를 향한 것이었던 것처럼 그라스의 소설은 독일인 전체를 향한 울부짖음이었다.

▲ 삽화: 이철행 기자 will502@snu.kr
 
나는 늘 기린처럼 위로부터 비스듬히
지렁이의 눈으로 아래로부터 비스듬히
이해하려 애썼다오,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 무언지
태초에 무엇이 먼저였는지, 닭인지 달걀인지를.
그러니 그대 부디 너그러이 보아주오, 나의 물구나무가
끝끝내 물음표처럼 보일지라도.
- 그림시집 『라스트 댄스』의 「마지막 소원 세 가지」 중에서

 

물구나무서서 바라본 역사

귄터 그라스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잊힌 사람들의 역사, 즉 패자의 역사를 기록하려고 시도했다. 거대한 역사 속에서 흔히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흥미롭게도 이 말은 아돌프 히틀러의 입을 통해 나온 적이 있다. 히틀러는 “역사는 승리자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고, 정의는 승자를 찬양하는 미사여구일 뿐”이라고 한 바 있다. 하지만 귄터 그라스는 승자의 역사관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생전에 “작가는 승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작가가 앉을 곳은 그때그때 패자들이 앉아 있는 그 곳”이라며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야말로 작가에겐 더욱 소중한 존재”라고 강조했다.

동일한 맥락에서 그라스는 1977년 발표된 소설 『넙치』에서는 남성 중심의 보편적인 역사관을 비판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말하는 넙치는 인류의 역사를 꿰고 있는 신적인 존재로,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성에게 여성보다 우위에 설 것을 설파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남성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넙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해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여성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두 눈이 모두 한쪽에 몰려 한쪽 방향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넙치는 역사의 한쪽 면만을, 즉 남성의 역사만을 바라보는 편협한 역사관에 대한 알레고리인 것이다. 박병덕 교수(전북대 독어교육과)는 “귄터 그라스는 『넙치』를 통해 나치시대에 국한하여 다룬 과거 극복의 테마를 4천여 년에 걸친 남녀 대립의 변증법적 인류문명사 차원으로 확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그라스는 나치가 저지른 엄청난 죄악 때문에 수장됐던 주제, 독일인 희생자 문제를 재조명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독일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극우파와 친나치 세력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는 정치적 금기였다. 하지만 그라스는 “극우주의자들이 이 사실을 기록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뤄야 한다”며 소설 『게걸음으로 가다』를 발표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2차 대전 당시 독일 피난민 1만여 명을 수송하다 소련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에 침몰당한 구스틀로프호의 비극을 다뤘다. 귄터 그라스는 소설의 제목인 ‘게걸음’처럼 옆으로 걸으면서, 역사가 기억하지 않았던 구스틀로프호 사건을 재조명한다. 이와 더불어 2차 대전이라는 세계의 비극 속에서 잊힌 독일 희생자의 역사도 기억하자고 말한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작가 본인의 경험과도 연결돼 있다. 자서전『양파껍질을 벗기며』에서는 그라스가 미군의 포로가 됐을 때, 그라스의 어머니가 단치히를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강간 당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치 군인이자 전쟁의 희생자였던 귄터 그라스이기에 그의 작품은 독일인의 평범함 속에 숨은 악을 비판하면서도 물구나무를 서서 역사를 다르게 볼 수 있었다.

정치와 예술 속에서 삶을 되찾다

패자의 역사까지 아우른 귄터 그라스는 역사의 거울에 비친 문학 너머의 현실을 바라봤다. 그라스 연구자들은 어떤 작가보다 그가 더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한 단서를 『양철북』 속 ‘검은 마녀’에서 찾았다. 소설의 후반부, 전쟁 후에도 오스카는 여전히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검은 마녀의 악령을 두려워한다. 이 검은 마녀는 다양한 모습의 환상으로 나타나 오스카를 괴롭히는데, 어떤 때는 괴테의 모습을 한 채 나타나기도 한다.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어독문학과)는 “검은 마녀는 너무나 해석이 다양해 전문가마다 의견이 갈린다”면서도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나치라는 정치적 불행을 가능케 한 정신사적, 예술사적, 철학사적 근원”이라고 해석했다.

‘검은 마녀’가 나치라는 비극의 원인이라면, 왜 『양철북』에서는 그것이 괴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을까? 그라스가 볼 때 나치라는 재앙의 수많은 원인 중에는 괴테로 대표되는 독일의 사상적 전통도 있었던 셈이다. 독일은 내면세계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관념론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전통 속에서 괴테는 독일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자 최고의 인문주의자였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파우스트』까지 괴테의 문학은 독일 인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됐다. 하지만 반대로 내면에 대한 극단적인 추구는 사람들의 관심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김 교수는 “그라스가 봤을 때 괴테의 휴머니즘에는 정치가 결여돼있었고, 전통적인 독일인의 탈정치성이 나치가 집권할 수 있는 간접적인 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그라스는 정치에 대한 독일인의 무관심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 나치의 집권과 그에 대한 독일인들의 열광으로 나아갔다고 봤다.

이에 귄터 그라스는 잘못된 전통은 거부해야 한다고 보고 삶 속에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양철북』 발표 후, 그라스는 시민으로서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무릎 꿇으며 사죄했던 빌리 브란트 총리의 연설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으며, 죽기 전까지 스스로 밴을 몰고 다니며 선거운동 자원봉사자들과 끼니를 함께 하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1999년 노벨상 수상 후 그가 가장 처음 한 일도 주의회 선거에 지원 유세를 나간 것이었다. 1960년대에는 사민당의 열렬한 지지자로, 2000년대에는 우크라이나 사태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립에 대한 비판자로서, 그라스는 세계 정치현실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검은 마녀를 통해 정치성의 회복을 말했다면, 그라스는 클레프라는 극중 인물을 통해서 예술의 생명력을 강조했다. 『양철북』에서 나치의 몰락과 함께 아버지의 무덤에 양철북을 버렸던 오스카는 허름한 하숙집 옆방에 살던 클레프를 만나게 된다. 클레프는 전쟁 후 삶의 목적을 잃고 외로움에 사로잡혀 침대에서 나오지 않던 인물이었다. 오스카는 그를 깨우기 위해 다시 한 번 더 북채를 손에 쥐고, 오스카의 북소리에 클레프는 한동안 불지 않던 자신의 플루트를 꺼내게 된다. 몇 시간의 합주가 끝난 뒤 클레프는 수개월 만에 침대에서 나와 몸을 깨끗이 씻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되찾는다.

작가는 예술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가까이 있고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나아가 인간이 이를 통해 과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에게 예술은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하는 행위, 혹은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삶에서 우리에게 추진력이 되는 에너지의 발산이었다. 그라스는 재즈 밴드의 드러머로 꽤 뛰어난 연주 실력을 지녔고, 젊은 시절 춤을 좋아해 못 추는 춤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소묘에도 일가견이 있어 지금도 귄터 그라스가 직접 그린 동료 작가들의 초상화와 본인 소설의 표지 그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달픈 현실에 침전할 때마다, 예술은 그라스에게 실패했던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아갈 힘을 줬다. 그는 현실참여에 대한 의무, 예술에 대한 열정과 함께 살아간 인간이었다.

달팽이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귄터 그라스는 한국의 현실에도 관심이 많았던 작가였다. 그는 70년대부터 군사정권하에 탄압받는 장준하, 김대중 등의 민주인사와 김지하, 황석영 등의 작가가 구속될 때마다 앞장서서 석방 운동을 벌였다. 김누리 교수는 “70년대 국제펜클럽대회에서 한국펜클럽 대표가 독재정권을 두둔하는 말을 늘어놓자 그라스가 단상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뺏고 그를 쫓아냈던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고 전했다. 그런 그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처음으로 방한해 개막식에 참석한 6만 6천여명의 관중 앞에서 낭송한 축시 또한 현실에 대한 그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 때 사람들은 꽉 찬 관중석을 보았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앞에 서있었고,
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
오프사이드.
- 2002년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낭송된 축시 「밤의 경기장」

 

여기서 왜 시인은, 귄터 그라스는 반칙임에도 홀로 골대 앞에 서있었을까. 공이 하늘 높이 떠올랐을 때, 관중들의 눈은 역사의 현장인 경기장이 아니라 공을 향한다. 반면에 그라스는 관습과 전통의 차디찬 호각 소리에도 불구하고 오프사이드 라인을 넘어 새로운 사유의 영토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인은 경기장 전체를 바라보며, 아무도 보지 않는 반칙의 선 너머의 역사를 보고자 했다.

공이 아니라 경기장 전체를 조망하고자 했던 그라스의 역사관은 한쪽 입장만을 고수하는 한국사회의 역사 인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영화「암살」의 김원봉은 일제 강점 시절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싸운 투사였지만, 분단 이후에는 6.25전쟁을 일으켰던 북한 정권의 실세였다.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의 김원봉은 모두 실재했던 역사이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야기지만 온전히 기록되고 있지 못한 망각의 기억이다. 하지만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해석하는 두 가지 측면 모두가 역사 교과서에서, 상업 영화에서 제대로 기억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걸 일련의 논란 속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분명 우리는 빛나는 과거의 역사뿐 아니라 악취 나는 과거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이 다양한 역사 해석의 논쟁 속에서 그라스는 재판관이 아닌 죄인의 입장으로, 승자가 아닌 패자의 입장으로 잊힌 역사를 기억하라고 삶과 작품을 통해 이야기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패자의 역사 또한 기억된다면 그라스가『달팽이의 일기』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달팽이와 같이 역사 속에서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귄터 그라스는 책 속의 오스카처럼 삶 속에서 역사를 잊지 말라고 죽을 때까지 양철북을 두드렸던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는 자만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 귄터 그라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