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해부하다 생긴 일』 정민석 작가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이 울리는 어둑한 해부학교실 복도. 구석의 방으로 들어가면 포르말린에 절인 시체 모형 대신 만화 캐릭터가 벽에 붙어있다. 서류봉투에 싸인 만화 콘티가 책꽂이에 수북이 꽂혀있는 풍경이 해부학자의 실험실이라기보다는 영락없는 만화가의 작업실이다. 책장 한 편에는 해부학 자료를, 다른 한 편에는 만화 관련 자료를 가득 채워둔 해부학 교수이자 만화가인 ‘해랑 선생’ 정민석 작가를 만났다.

▲ 선 몇개로 단순하게 표현된 캐릭터지만 해랑 선생은 정민석 작가와 판박이다.
  사진제공: 정민석 작가

◇과학을 재료삼아 탄생한 명랑만화=학창시절 고(故) 길창덕 화백의 『꺼벙이』를 따라 그리며 만화가의 꿈을 키우던 정민석 작가는 부모님의 권유로 의대에 진학하게 됐다. 아주대 의대 해부학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가 나이 마흔에 펜을 잡게 된 이유는 그의 전공인 해부학 때문이다. 해부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내용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칠판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그가 만화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 수업 중 그렸던 만화를 각색해 「과학동아」에 연재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정 작가는 해부학자로서 겪는 경험을 ‘실없는’ 농담하듯 풀어놓는 그만의 ‘과학 명랑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해부학 사랑’의 줄임말인 ‘해랑’을 호로 삼은 그는 자신의 캐릭터 ‘해랑 선생’을 내세운 과학 명랑만화 『해랑 선생의 일기』와 『해부하다 생긴 일』을 펴냈다. 현재 그는 한겨레 사이언스온에 과학에 관련된 농담을 4컷에 담아낸 만평 『꽉 선생의 일기』를 연재하며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해부학을 공부한 30여 년 동안 만화의 내용적 기반을 쌓아온 셈이기 때문에 정 작가는 늦깎이 만화가가 된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은 물론 새와 고래 등의 동물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해부학 지식부터 생리학과 발생 생물학까지 그가 아는 모든 과학적 지식은 만화의 재료가 된다. 단순한 작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만화가 저력을 갖춘 비결은 바로 만화의 근간이 되는 텍스트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재미있고 유익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민석 교수는 “그림보다는 만화 안에 담긴 텍스트의 매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만화를 만들고 싶다”는 만화관을 밝혔다.

▲ 자유로움을 중시하는 정민석 작가가 의사 가운 대신 사무실에서 등산복을 입고 있다.
  사진: 유승의 기자 july2207@snu.kr

◇실없는 농담 속 든든한 뼈대=유려한 그림체의 만화에 익숙한 독자라면 정 작가의 단순한 그림체를 보고 당황할 수 있다. 주인공 ‘해랑 선생’은 네 가닥이 전부인 머리카락에 점 두 개를 콕콕 찍은 듯한 눈이 박힌 단순한 외형의 캐릭터다. 섬세한 표정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단순하게 그려진 캐릭터는 특유의 친근함으로 의학적 지식이 섞인 농담과 함께 재미있는 지식을 전해준다. 예를 들어 “감기를 치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감기약을 먹지 않으면 7일, 감기약을 먹으면 1주일”이라는 농담을 던진 뒤 “푹 쉬는 것이 좋은 치료라는 뜻이죠”라고 수습하는 식이다.

정민석 작가의 만화에 녹아있는 농담도 글로 하는 언어유희가 대부분이지만 그 겉모습과 달리 탄탄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의 4컷 만화는 각 컷별로 기, 승, 전, 결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기와 승에서는 상황을 설명하고 전에서 반전을 주고 결에서는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다. 또 한 번의 입질에서는 독자들이 웃음을 터뜨리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웃음 포인트는 꼭 두 번 넣어야 한다. 정 작가는 “나름의 형식이 있다는 점에서 4컷 만화는 한 편의 정형시와 같다"고 말했다.

정 작가의 농담은 단순히 웃기기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어떤 분야에서 통용되는 농담은 그 분야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지표기도 하다”며 “농담을 던지면 많은 사람들은 농담에 담긴 내용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의 짧은 만화에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다보면 어느새 발생학적 지식이라든지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근육의 기능을 이해하고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돼지 피부에 대한 해부학적 이해를 할 수 있다. 이처럼 그는 해부학이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 실없는 농담으로 다가가 손을 내민다.

◇15년째 이중생활 중인 ‘아마추어’ 만화가의 비결=일반적으로 ‘적자생존’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이 살아남는다는 의미지만, 정민석 작가는 이를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의미로 바꿔 사용한다. 적자생존의 마음가짐으로 만화를 그리는 정 작가는 메모가 적혀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지갑에서 꺼내보였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농담을 메모하며, 이를 만화 그릴 때 유용하게 써먹는다는 그는 “내가 태생적으로 웃긴 사람은 아니었고, 오히려 타인을 웃기기 위해 후천적으로 엄청나게 노력한 경우다”고 말했다.

선천적인 유머감각도, 화려한 그림체도 갖지 못한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소개하는 정 작가지만 과학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명랑하게 전달하는 그의 만화에는 독특한 매력이 존재한다. 15년째 한같이 자신만의 만화를 그려가고 있는 정민석 작가의 수첩에는 오늘도 만화의 원천인 농담이 빼곡히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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