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떠도는 내 이야기…‘잊힐 권리’ 국내 도입될까
인터넷에 떠도는 내 이야기…‘잊힐 권리’ 국내 도입될까
  • 최하영 기자
  • 승인 2015.09.06 0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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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잊힐 권리 법제화를 둘러싼 논란

스페인의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는 인터넷을 검색하다 깜짝 놀랐다. 12년 전 자신이 부동산 강제경매를 했던 사실이 한 일간지 웹사이트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변호사인 그는 과거의 기록이 자신의 직업에 해가 될까 우려했다. 그는 신문사에 이를 삭제하거나 수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구글에는 검색 데이터가 나오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페인 정보보호 당국은 신문사는 해당 정보를 삭제할 필요가 없지만 구글에는 조치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 결정에 반발한 구글이 사건을 유럽사법재판소로 끌고 갔고 유럽사법재판소는 곤잘레스의 손을 들어줬다. 결과적으로 기사는 삭제되지 않고 구글에 대한 링크 삭제요청만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지난해 뜨거운 화두로 등장한 ‘잊힐 권리’ 판결이다.

잊힐 권리란?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을 시작으로 잊힐 권리에 대한 논의가 전 세계적으로 촉발됐다. 잊힐 권리는 ‘인터넷상에 게시된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삭제해 달라고 요구해 해당 자료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를 말한다.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 요지는 정보주체(정보의 주체가 되는 사람으로서 처리되는 정보에 의해 알아볼 수 있는 사람)가 요청하면 부적절하거나 시효가 지난 검색 결과물을 제거할 책임이 포털 사이트에 있다는 것이었다. 디지털 기록이 평생 사람들을 쫓아다니는 것이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유럽연합에서는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을 계기로 잊힐 권리의 입법화가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잊힐 권리에 대한 많은 논의와 입법 시도가 있었다.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이 지난 2013년 2월 자신의 저작물을 삭제할 권한을 보장하는 내용의 저작권법 개정안과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아직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우리나라에 잊힐 권리를 직접 명시하는 법 조항은 없다. 하지만 잊힐 권리의 취지만을 놓고 보면 잊힐 권리는 현행 개인정보보호법과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어느 정도 보호받고 있다. 개인정보보호법은 정보주체가 자신에 관한 정보를 삭제하라고 요구할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국가가 통계나 안보를 목적으로 수집하는 정보나 언론·종교단체·정당이 수집하는 정보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자신이 직접 열람한 개인정보를 삭제 요청할 수 있다. 그럴 경우 개인정보처리자(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공공기관, 법인 단체, 개인 등)는 삭제나 수정 등의 조치를 한 후 그 결과를 정보주체에게 알려야 한다.

한편 잊힐 권리는 정보통신망법 제44조가 규정하는 ‘임시조치’(블라인드 처리)에 의해서도 일부 보호받고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누구든지 인터넷에 있는 정보로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의 피해를 당했을 때 해당 정보를 취급한 서비스 사업자에게 신고할 수 있다. 이 경우 서비스 사업자, 즉 포털은 해당 정보를 삭제하거나 임시조치해야 한다. 이는 당사자 신고만으로 임시조치 혹은 삭제가 이뤄지도록 법에서 규정하는 것으로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제도다.

잊힐 권리, 제도로 보장해야 한다?

한편에선 현행법하에서는 잊힐 권리를 포괄적으로 보장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도 정보주체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삭제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지만 잊힐 권리가 단순히 정보의 삭제권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박노형 교수(고려대 법학과)는 “잊힐 권리를 인정한다면 표현의 자유 같은 다른 권리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그러려면 잊힐 권리와 관련된 법률 요건이나 행사 방법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잊힐 권리를 법에 명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박노형 교수는 “(법제화되지 않을 경우) 잊힐 권리를 검색엔진에 요구할 때 검색엔진이 그 요청에 따르지 않을 경우 제재할 근거가 없다”며 잊힐 권리를 법제화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난 5월 15일 방송통신위원회 주최로 열린 토론회 ‘잊혀질 권리 보장을 위한 세미나’에서 법무법인 태평양 이상직 변호사는 “(잊힐 권리가) 미래 모바일 사회, 온라인 사회에서 약자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필요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이미 잊힐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고 있다?

한편 현행법으로도 잊힐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고 있다는 입장도 있다. 임시조치 제도의 경우 포털은 논쟁을 피하기 위해 임시조치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마저도 30일 이내에 정보제공자의 이의제기가 없을 경우 자동으로 정보가 삭제되는 경우가 많다. 국회입법조사처 심우민 입법조사관은 “개인이 삭제 청구를 하게 되면 양대 포털에서는 소송을 피하려고 임시조치하는데 임시조치 수용 건수가 연간 20만건에 달하고 80~90%가 이의제기가 없어서 삭제된다”며 “임시조치 제도가 남용되는 상황에서 잊힐 권리 제도화는 검색결과를 왜곡해 검색 중립성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오히려 무분별한 게시물 삭제를 제한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잊힐 권리가 특정 권력 집단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강정수 연구위원(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은 “최근 연구결과를 봐도 어떤 기관이나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잊힐 권리를) 더 남용한다”고 주장했다. 잊힐 권리가 정작 보호해야 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집단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잘못 활용될 여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잊힐 권리가 지금보다 확대 적용될 경우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특히 잊힐 권리의 적용 범위를 언론 기사에까지 넓힐 경우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라는 비판도 거세다. 심우민 조사관은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기술적 중립성에 대한 신뢰를 요구하고 특히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검색 중립성이 요구된다”며 잊힐 권리의 과도한 보장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우려했다.

잊힐 권리 법제화, 신중히 결정해야

잊힐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합의된다고 해도 남은 과제가 산더미다. 먼저 잊힐 권리를 법적으로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잊힐 권리의 법제화를 위해서는 어떤 정보가 잊힐 수 있고 어느 범위까지의 정보가 타인에 의해 처리될 수 있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앞선 토론회에서 법무법인 민후 김경환 변호사는 “기사를 (잊힐 권리에 의해 처리되는 정보에) 포함시키는 게 잊힐 권리의 완전성이나 실효성 측면에서 바람직하나 언론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며 “언론중재법의 정정보도 청구, 반론보도 청구 등과 잊힐 권리를 어떻게 짜임새 있게 엮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잊힐 권리가 다른 법익과 충돌할 때에 대비해 다른 법익과의 조화와 균형을 실현할 현실적인 방안을 찾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한 번 퍼져나가면 개인이 통제하기 어려운 인터넷 정보를 통제할 수 있도록 기술적 기반이 마련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필요성에 착안해 강원도청은 최근 데이터에 수명을 부여하는 디지털에이징시스템(Digital Aging System)의 사업화 계약을 체결했으나 아직 도입 단계에 불과하다. 한국소비자원 박희주 선임연구원은 “어떤 정보가 공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잊힐 권리가 부인될 부분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개인의 정보에 대해 충분히 보호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잊힐 권리의 법제화를 현실화할 수단이 마땅치 않고 논란이 종식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잊힐 권리의 법제화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강정수 연구위원은 “한국에서도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논의가 더 나와야 한다”며 “인터넷에서의 중요한 사회적 논의가 대단히 제한적인 전문가 집단에서만 얘기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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